[매일춘추] 닌텐도 스위치와 ‘이상화’

입력 2020-04-27 15:05:43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팀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팀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팀

빌릴 물건이 있어 형 집에 잠깐 들렀다. 뛰쳐나와 늘 반갑게 맞아 주던 조카가 웬일인지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가져갈 책 몇 권을 손에 들고 집안을 살펴보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춘기라서 그런가 아니면 꾸지람을 들었나 생각하며 용돈을 쥐어줄 요량으로 다가갔다. 사춘기라던가 꾸지람 같은 것은 나만의 짐작이었을 뿐, 인기척도 모를 만큼 무언가 삼매경에 빠져 있다가 툭 치니 고개를 들어 씨익 웃는다.

무엇에 그리 집중하고 있는지 물으니 요즘 한참 인기 있는 닌텐도 스위치의 '동물의 숲'이라며 눈빛을 반짝거린다. 심취한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 잠깐 받아 손에 쥐고 게임을 해봤다. 왜 삼매경에 빠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관심이 생겨 한 번 사볼까 검색하다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우선 닌텐도가 '동물의 숲'이라는 인기에 힘입어 품절된 지 한참일뿐더러, 아쉬움에 검색한 기사를 대할수록 낯빛이 붉어지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외교적 대립으로 인해 얼마 전까지 벌어진 '노 재팬! 가지 않겠습니다. 사지 않겠습니다'의 범국민적 불매운동이 아직 진행형이지만, SNS상에는 우스갯소리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가 아니라 특정 제품에 대한 불꽃매진이 연일 이어진다는 말이 돌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동물의 숲' 게임상에는 한국 게임사용자에 의해 '불매운동의 글귀가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일본의 역사왜곡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애써온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는 2020년 4월 8일의 한 신문기사에서 이런 현상에 대해 꼬집으면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켰으면'하고 이야기하였다.

불현듯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최초로 실린 '개벽'(개벽사, 1926. 6)이 생각났다. 초판본 수집을 위해 전국 고서점과 지역의 원로문인들을 수없이 찾아다닌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근대 자료와 항일, 반일운동을 한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자료를 발굴·구축하기 위해 노력한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자괴감 섞인 물음이 머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게임이라는 장르도 현대에는 하나의 문화 장르로 자리 잡았다. 역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과 접목하여 대중적, 상업적으로 현대인들의 일상에 가까이 스며들고 있다. 하지만 재미를 생각하기에 앞서 서경덕 교수의 일침처럼 역사와 현실 속에서 역설에 처한 우리의 모습을 한번쯤 먼저 돌아봄은 어떨까?

일제강점기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썼다. 이 시기를 지나온 선인들은 이처럼 단어 하나, 문장 한 구절에도 가슴 속 항일의 염원을 담아 책에 아로새겼을 것이다. 현실 속 빼앗긴 들은 다시 찾았지만, 의식 속의 봄은 아직 오지 않은 듯하다. 이 봄, 우리의 몸과 마음 속에 아카이빙되어 있을 우리의 유고한 역사적 자의식을 자유로운 바람 속에서 다시 한번 꺼내어 확인해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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