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공동대표
1970년대 말 즈음이었나 보다. 대통령이 그랬다. 세계가 알아주는 부자 나라, 1980년이면 우리도 선진국이 된다고 했다. 그래 봤자 고작 몇 년 뒤지만 그땐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순순히, 의심 없이 믿었다. 우리가 미국처럼, 일본처럼 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그 대망의 서기 1980년에 우리나라는 여전히 선진국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밖에 못 되었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가끔 TV나 라디오에서 우리 국민들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 된다고 할 뿐이었다. 안타까웠다. 대통령이 불의의 사고만 안 당했더라도 착착 계획대로 선진국이 되었을 성싶어 더 아쉬웠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듯 선진국은 우리의 소망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쉼 없이 우리를 나아가게 했다.
1990년대, 나라에선 한층 '선진국 되기'에 박차를 가했다. 시대는 포스트 모던했어도 방법은 같았다. 온 국민이 똘똘 뭉쳐 함께 노력하는 것이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아 기업은 나날이 성장했다. 국민소득 1만달러도 달성했다. 그러나 20세기 막바지에 찾아온 외환위기가 그 성과를 앗아갔다. 선진국이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한국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다는 해외발 뉴스가 전해지자 국민들은 마치 내 탓처럼 여겼다. 유력한 인사들은 '사람들이 너나없이 해외여행 간다고 할 때 알아봤다'며 그런 마음에 가책을 더했다. 이른바 지식인들은 이로써 우린 또다시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했다며 판정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선진국 문턱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자리매김되었다.
2000년대, 인터넷이 열어젖힌 새로운 세상에서 남다른 노력으로 IT 강국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산업의 지평이 넓어지고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었지만 우리가 위치한 곳은 변함없이 선진국 문턱이었다. 심지어 IMF가 우리를 선진국이라고 해도 우린 아니라고 했다. 각계의 유력 인사와 전문가, 그리고 언론과 '사회의 어른'들이 나서서 그랬다. 국민소득이 1만달러일 때는 적어도 2만달러, 2만달러를 넘기면 다시 3만달러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3만달러에 이르자 우리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낮아서 아직은 선진국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고는 30여 년 전 부모 세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식 세대에게도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요구했다. 혹시라도 정부에 따라 이런 태도와 정책 기조가 바뀔라치면 가만있지 않았다. 지난해, 한 원로 경제학자는 소득주도성장과 근로시간 단축을 가리켜 '우리가 무슨 선진국이라도 된 줄 아느냐?'며 정부를 질책했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선진국과 싸워서는 절대 못 이긴다는 논리로 청년들을 타일렀다.
돌아보면 선진국 문턱에서 보낸 세월이 어언 40여 년이다. '선진국에선 이렇게 한다더라'며 무엇이든 선진국을 따라 했다. 논쟁을 벌일 때도 선진국을 예로 들었고 정책을 수립할 때도 먼저 선진국의 사례부터 찾았다. 그렇게 선진국은 모든 것의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했다. 현실에선 미국과 유럽의 주요 나라, 그리고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관념적으론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신기루나 이상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상상치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이른바 선진국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치자 '한국은 이렇게 한다더라'며 우리를 배우고 따라 하려 든다. 그리고 도와달라고 한다. 한 국가의 총체적 역량과 정부의 실력은 위기 시에 드러난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일찍부터 신종 감염병을 인류에게 닥칠 중대한 위협으로 꼽으며 선진국들의 선도적 역할을 주문했다. 지금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우리다. 요즘 같아선 오히려 우리나라가 미국 같지 않고 일본 같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의 길이 세계의 길이 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몰랐다 해도 우린 이미 선진국이다. 선진국 문턱을 진즉에 넘어섰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다른 나라들이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에 찬사를 보내든 말든 우린 정부를 마음껏 비난하고 옥죄어도 되니 더욱 선진국이다. 소망은 이루어졌다. 그동안의 간절함은 좀 줄이고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더 많이 찾아보자. 선진국은 결국 그런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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