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1920년대 소년운동과 대구화단

입력 2020-04-07 14:17:06

박민영 대구미술관 교육팀장

박민영 대구미술관 교육팀장
박민영 대구미술관 교육팀장

지금 우리는 전환의 시점에 놓여 있다. 사회의 거대한 변화는 사람들의 사고를 전환시키고, 그러한 변화를 예술가들은 앞서서 반영해왔다. 사회를 바꾸는 것은 한 시대의 사건이지만, 이것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었다.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오늘 여기의 모습을 만들었기에 그러한 변화의 시점을 조금씩 이야기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 같다. 그래서 대구의 사회와 예술의 변화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고, 어떻게 방향을 잡아 갔는지를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기준으로 몇 회에 걸쳐 조금씩 서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대로 거슬러 가보자. 1927년에서 1929년 사이 대구에는 10대 청소년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과회'(영과회 또는 공과회로 불리기도 했다.)라는 예술 단체가 있었다. 1920년대에 이러한 조직이 나타난 배경에는 1919년 3·1운동으로 자극된 사회운동, 그중 전국 각지에서 불붙은 소년운동과 관계가 있다.

3․1운동 이후 민족운동가들은 점진적으로 실력을 양성하고, 독립의 힘을 모으고자 문화운동을 일으켰다. 그런 가운데 1920년대 소년운동은 전국적으로 붐을 이루었는데, 1926년에는 전국에 126개의 소년단체가 존재할 정도였다 한다. 특히 이때의 소년운동은 10대 후반에서 20대의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었고, 소년을 위한 운동임과 동시에 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한 소년운동이었다.

지난해 대구예술발전소에서 크게 조명했던 이상춘(1910-1937)은 영과회를 조직하고 주도한 인물로 1920년대 중반 대구노동소년회와 1927년 대구소년동맹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영과회의 조직은 소년들의 예술로 사회에 영향을 미친 문화운동이었다. 영과회에서는 소년들의 시와 동요, 그림을 공개모집하여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10대의 소년들 가운데는 미술에서는 이인성을 비롯해, 배명학, 이갑기, 김성암 등이 있었고, 동요와 문학에서는 신고송, 윤복진 등이 다음 세대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과회가 있게 된 또 하나 중요한 배경에는 이들의 활동을 후원한 선배 성인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1927년 영과회에 찬조출품 형식으로 동참하였다. 미술에는 서동진, 박명조, 최화수, 김용준, 문학에 이상화 등과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1920년대 초 이미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대구의 새로운 예술의 시작을 알렸고, 이제 다음 세대를 이끌고 있었다.

선배의 후원과 후진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1920년대 대구의 근대 화단은 조금씩 모습을 갖추어 갔다. 제대로 된 교육기관도 없었고, 일본인들에 의해 이식된 화풍이라는 한계도 있었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처럼 예술에서도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확장하려 하였다. 거기에 당시의 신진들이 새로운 문화운동으로 호응하고 있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