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뜻을 세웠으면 사사로운 정은 잊고 그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다.
안중근(1879~1910) 의사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에 입문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인재양성을 위해 석탄상점을 팔아 돈의학교를 세웠으나 일제탄압으로 불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1908년 의병장이 되어 일본군과 싸웠으며, 1909년 2월 17일 연해주에서 안중근 외 11인이 왼손 약지를 끊어 단지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10월 26일 민족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 역에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안중근은 침략의 원흉이 특별열차에서 내리자 경계망을 뚫고 권총으로 그를 저격하였다. 그 외 3명의 일본대신에게 중상을 입히고 대한민국만세 '코레아 우라'를 외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나라를 잃고 굶주린 채 독립운동을 하던 중 어머니가 몹시 그리워 일경의 눈을 피해 밤중에 어머니를 찾아갔다. 방 앞에서 조용히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가 버선발로 맞아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머니의 반응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내 아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러 나간 후 아직 그 일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누가 나를 부른단 말이냐?" 어머니의 단호한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든 중근은 크게 깨닫고 돌아섰다. "그렇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대장부가 뜻을 세웠으면(立志) 그 일을 성공할 때까지 모든 것을 잊고(忘情) 전념해야 한다. 중근은 엎드려 천주님께 기도하고 어머니의 소망을 이루어 드리기 전에는 결단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어머니 조마리아는 아들이 거사를 결행하고 뤼순감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썼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 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마음 먹지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 편지를 받은 다음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안중근 의사 나이 31세였다.
안중근은 어머니께 마지막 유서를 썼다. "불초 이 자식 감히 어머님 전에 한 말씀 올립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드리지 못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중략> 이 불효자를 훗날 영원한 천당에서 만나 뵈옵기를 바라오며, 장남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시고 정근과 공근도 주님께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안중근 의사의 치열한 삶은 불꽃이 되어 우리민족의 기상을 일깨우고, 3·1 정신으로 분출 되었다. 허나 국권이 회복 되거든 나의 뼈를 고국에 반장(返葬)해 달라는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고 있음이 심히 가슴 저리다.
효창원 7위선열 기념사업회 이사 두평 임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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