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단편소설 '변방을 위하여' 김준현
매금왕은 갈문왕과 마찰은 있었으나 단 한 순간도 갈문왕의 반란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갈문왕은 자기의 아우였다. 국정을 통치하는데 있어서 생각은 달랐으나 동생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따라서 이번 거벌모라의 반란을 처리하는 것에 있어서도 동생을 전적으로 믿고 맡겼던 것이었다. 군대의 구성을 자세히 살폈다면 의심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교 공인, 금관가야와 외교 등에 신경 쓰느라 모든 일을 상세히 살필 여력이 되지 못했다. 그래, 자신은 죽음을 당한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복 여동생이자 갈문왕이 가장 사랑하는 어사추여랑이 이야기 해주지 않았더라면.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郎)은 갈문왕의 누이이자 연인이었다. 누구보다 갈문왕을 사랑하였으나, 매금왕 또한 진정 존경하고 따랐다. 항상 지아비에 대한 사랑과 가족애에 대한 마음이 계속 충돌하였다. 그리하여 갈문왕과, 매금왕의 갈등을 옆에서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이야은성이 함락되기 전 갈문왕이 지도를 니모리에게 전해주는 것을 옆에서 보며 마음의 불편함은 더욱 증폭 되었다. 여인으로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갈문왕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새로 즉위한 갈문왕 곁에서 왕비로 등극하는 것이 누구보다 행복해지는 길이었다. 하지만 갈문왕이 형제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을 그냥 바라볼 수도 없었다. 형제 중 누구하나 죽는 것을 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이번 일이 그냥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 된다 하더라도, 다음에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서로 함께 손을 잡고 갈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갈문왕이 반란을 준비하는 사이, 그녀는 오랜 시간 천천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침내 그녀는 만물에 있어서 거스를 수 없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혼인이었다.
지금의 매금왕은 딸만 있을 뿐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은 없었다. 매금왕의 딸과 갈문왕이 혼인을 하여 아들을 낳게 한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 아들은 매금왕의 외손자이자, 갈문왕의 아들인 셈이 된다. 물과 기름 같이 섞일 수 없는 두 사람이 아들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비록 자신이 정비(正妃)는 될 수 없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자기가 원한 것은 갈문왕의 사랑이었지 정비(正妃)의 자리가 아니었다. 갈문왕 옆에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어사추여랑은 이 같은 생각을 정리하고 매금왕을 만났다. 갈문왕이 거벌모라에서 니모리에게 이야은성 지도를 준 사실부터 군 조직을 구성하는 것까지 낱낱이 모두 이야기 하였다. 덧붙여 둘 사이를 이어줄 자신의 방안까지 이야기 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뒤 얼마간 매금왕은 시름에 잠기었다. 그리고 이내 마음을 정한 듯 군사를 일으켜 갈문왕의 처소로 쳐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갈문왕은 당황하였다. 왕이라는 직책보다 피가 섞인 형제라는 것에 호소하기 위해 옛 시절 함께 뛰 놀던 어린 아이처럼 말하였다.
"닥쳐라. 내가 네 놈 속을 모를 줄 알았더냐? 어찌 나를 죽일 계획을 세우면서 그리도 편안하게도 있었더냐."
형은 옆에 있던 병사의 칼을 뽑아 동생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동생은 얼음 같은 칼의 냉기를 느꼈다. 칼은 자신의 얇은 피부를 뚫었다. 흘러나온 피가 자신의 비단 옷에 떨어지고 있었다. 칼날은 차가웠으나 피는 뜨거웠다. 마치 촛농에서 초가 흐르듯 했다. 동생의 심장도 뜨거웠다. 이내 그 심장은 칼처럼 차갑게 식었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형님의 선택에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형은 동생의 목에 칼을 대고 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오로지 감고 있는 동생의 눈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초가 영겁의 시간 같았다. 매금왕은 칼을 든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칼을 다시 번쩍 들었다.
짧은 순간에 동생은 모든 것의 끝이 왔음을 직감하였다. 오히려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모든 것이 끊어지는 듯한 아련한 가벼움이 온 몸에 밀려왔다. 허나 이승을 떠난 듯한 그 온몸의 가벼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날카로운 소음이 수십 개의 손이 되어 동생의 혼을 붙잡아 이승으로 앉혔다. 동생은 조용히 눈을 떴다. 형이 던져둔 칼이 바닥에서 덩그러니 흔들리고 있었다.
"내 딸과 혼인하여라."
동생은 뜻밖의 말에 형을 쳐다보았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 다만 내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라. 나는 더 이상 아들을 만들 수 없는 몸이다. 네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겠다. 우리 형제가 밑거름이 되어, 더러운 것을 치우고, 손수 피를 묻히자. 그리하여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은 이 나라를 내 외손자이자, 네 아들에게 물려주자. 알겠느냐?"
동생은 얼마간 생각을 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의 답을 확인한 형은 재빠르게 성큼성큼 걸어 문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주변을 에워쌌던 병사들도 형을 따라서 나갔다. 동생은 온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한쪽 옆으로 쓰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상을 잡아 지탱하였다. 온 몸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젖어 있었다. 고여 있던 물은 작은 불씨를 만나 펄펄 끓었다. 동생은 그 끓는 물에 빠져 생쥐 같이 처량하게 온 몸이 다 젖어버렸다.
매금왕은 6부 중 반란에 가담하려 했던 한기부, 습비부의 귀족들을 숙청한다. 이후 자신이 직접 정예군을 꾸려 거벌모라로 정벌을 보낸다. 거벌모라의 촌민들의 저항이 드셌지만 이야은성을 다시 탈환하고 니모리를 비롯한 주동자들을 모두 사로잡는다. 매금왕은 6부 회의를 열어 주동자들의 처벌을 정하였다. 니모리, 미의지, 탄지사리는 장 60대를 맞게 하였고 나이리, 나등리, 익사, 어근즉리는 장 100대를 맞게 하였다. 이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자, 얼룩소를 죽여 하늘에 바치는 제사를 거행하였다. 거벌모라 촌민들에게도 반란을 꾀하는 자들은 큰 처벌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거대한 비석을 만들게 하였다. 신라는 이렇게 다시 평안을 되찾았다.
-천 번을 삼킨 불꽃의 끝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만 같은 햇볕이었다. 만물이 햇볕에 타서 변하고 있었다. 벌판에 우뚝 솟은 거대한 돌 하나 만큼은 벌을 서는 아이처럼 모든 햇빛을 올곧이 혼자 받고 있었다. 갈문왕은 비석에 손을 대 보았다. 뙤약볕에 달궈진 돌의 표면은 분을 삭이지 못하는 억울한 아이의 뺨 같았다. 변방의 작은 불꽃은 이미 다 꺼져버린 뒤였다. 그 불꽃이 있었음만을 알리는 돌만 자리할 뿐이었다. 작은 불꽃을 이용하여 중심의 물길을 바꿔 보겠다는 그의 아련한 계획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신라 왕실 내 명실상부한 2인자였다. 그러나 스스로는 왕이 되지 못한 영원한 변방으로 생각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2년전 니모리와의 대화에서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던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으리라….
갈문왕은 다시 일으키려던 큰 불꽃을 속으로 삼켰다. 뜨거웠지만 눈물로 식혀서 삼켰다. 속에서 씹고 또 곱씹었다. 천 번의 대장장이 질 끝에 만들어지는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으로 내리치고, 눈물로 식혔다. 그는 수천 번 찍고, 식힌 불꽃을 아들에게 전하고자 마음먹었다. 아들이 안되면 그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의 아들까지도…. 자기가 죽더라도 자신의 혼만은 영원히 살아남아 후손들과 함께 숨 쉴 것이라 생각했다. 갈문왕은 뜨거운 돌에서 손을 떼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이 한바탕 불어왔다. 그 포근함 속에 갈문왕은 자신의 몸을 맡겼다. 바람에 비단 옷이 크게 펄럭였다.
〈끝〉
14) 사부지 갈문왕과 법흥왕의 딸인 지몰시혜비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은 신라 24대 진흥왕이다.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신라를 최대 영토로 확장케 하였으며 전역에 순수비를 만드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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