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조영석(1686~1761) '현이도'

입력 2019-12-22 18:25:54

미술사 연구자

비단에 담채, 31.5×43.3㎝, 간송미술관 소장
비단에 담채, 31.5×43.3㎝,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후기 사족(士族) 출신인 조영석의 그림이다. 호를 관아재(觀我齋)라고 했는데 '볼 관(觀)'은 천천히, 자세히 보는 것이다. '나를 살펴보는 집'이라는 인상적인 당호는 조영석이 자신의 집에 대해 지은 글인 「택기(宅記)」에 나온다. 조영석은 45세 때인 1730년 제천현감으로 있었는데 21살의 총명한 맏아들 중희(重希)를 전염병으로 갑자기 잃게 된다. 크게 상심해 사직서를 쓰고 서울로 돌아와 이듬해 북부 순화방의 인왕곡 실곡(實谷) 남쪽의 집 4채를 백금 150냥으로 구입해 두 형님과 조카 등 네 가구가 나란히 살게 된다. 이때 본채 남쪽에 기둥 5개짜리 4칸 집을 지어 서재로 삼고 자호한 '관아재' 현판을 달았다. 현판은 예술에 재능이 많았던 중희가 대자 예서로 써서 미리 판각해 두었던 것이다. 이 관아재를 한 동네 살던 이웃인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이 드나들며 30여년을 시와 그림으로 교유했다.

그래서 친하게 지냈던 조영석과 겸재 정선, 그리고 정선의 제자 현재 심사정을 '사인명화(士人名畵) 삼재(三齋)'라고 했다는 말을 오세창 선생이 『근역서화징』 '조영석' 항목에 적어 놓았다. 관아재는 겸재나 현재만큼 그림을 전문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인물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이 소문을 들은 영조가 어진 그리는 일에 참여시키려고 두 번이나 불렀으나 선비로서 화사(畵師)의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며 두 번 다 집필(執筆)을 거절해 임금이 불러도 가지 않았던 견개불기(狷介不羈)한 성품, 조영석의 두 형이 모두 글씨로 이름났고 문벌이 훌륭한 집안이었던 점 등도 참작되어 삼재로 꼽혔을 것이다.

'현이도(賢已圖)'는 자신도 그 구성원의 한 사람인 양반들의 놀이 장면을 그렸다. 평소 생활 속에서 그림거리를 찾아내 인물의 생김새며, 차림새가 당시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한다. 장기판의 등장인물은 모두 6명이다. 장기 알을 손에 쥔 대국 중인 두 사람 주변에 구경꾼이 셋 있고, 멀찍이 또 한 사람이 있는데 옆에 쌍육과 바둑이 있어 당시 고급 오락 세 가지가 나온다. 놀이도구 뿐 아니라 다양한 모자 구경도 풍속화의 재미를 더해준다. 외출할 때 쓰는 갓, 당나라 문인 백거이가 즐겨 썼던 낙천건(樂天巾), 평소 집에서 쓰는 탕건, 사방이 네모지고 위가 편평한 사방건(四方巾) 등이 나오고 맨머리인 총각도 그렸다.

장기 두는 광경인데 제목을 '현이도'라고 한 것은 『논어』에서 공자가 "배불리 먹고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없으면 딱한 일이다. 바둑과 장기가 있지 않은가? 그것이라도 하는 것이 아무 일도 안하는 것보다는 현명한 일이다"라고 한데서 취미생활을 현이(賢已)라고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018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간송미술관 특별전 '조선 회화 명품전'에 출품되었을 때 영어 제목은 '베터 댄 낫씽(Better than Nothing)'이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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