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 김용준은 자화상도 그렸고 지인들도 그렸다. '수화소노인가부좌상(樹話少老人跏趺坐像)'은 아꼈던 후배 서양화가 김환기(1913-1974)를 그린 소조(小照)식 인물화이다. 최근 한국 미술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바로 그 김환기이다. 김용준은 『근원수필』에서 김환기를 애정 어린 어조로 여러 번 언급했고 '키 장다리', '항아리에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며 인물 스케치를 곁들여 대중매체에 「키다리 수화 김환기론」(『주간서울』57, 1949.10.17)을 발표한 일도 있다. 김환기는 6척 장신에 마르고 목이 길어 학 같았다고 하는데 큰 키와 어울리는 장축(長軸)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수화소노인가부좌상'을 세로로 큼지막하게 써넣어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전서나 예서로 써넣는 표제 양식을 제목으로 활용한 것이다. 조선회화를 연구한 김용준의 미술사학자로서의 식견과 그 식견을 지인을 그린 인물화에 멋지게 적용시킨 화가로서의 역량을 잘 보여준다. 글씨는 조형성이 풍부한 김정희 고예(古隸)의 영향을 받아 자기화한 서풍이다. '상(像)'자를 전서로 쓴 것 또한 한 작품에 다른 서체를 섞음으로서 파격의 생동감을 준 김정희의 방식을 응용한 것이다. 그려진 인물로 보나 입고출신(入古出新)으로 고전을 체화한 양식으로 보나 김용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색이 없다.
조선 도자를 애완(愛翫)한 김환기의 모습도 드러난다. 김환기가 오른쪽 팔을 기댄 책상 위에는 책 4권과 붓 3자루가 꽂힌 필통이 있는데, 필통은 순백자로 보인다. 가부좌하고 앉은 김환기의 무릎 앞에 물고기가 그려진 큰 그릇은 이 날 근원과 수화의 담소(談笑)거리였던 철화 분청사기일 것이다. 김환기는 온 집안에 항아리가 가득한 '항아리광(狂)'이었다. 김용준은 그런 김환기를 "삼도화기(三島畵器)에까지 발을 뻗쳐서 항아리 열(熱)로 말미암아 탕진가산을 하다시피"한다고 했는데, 삼도화기는 그림이 그려진 분청사기이다. 김환기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연기가 꼬불꼬불 올라가고 있어 유머러스한 현장감이 생생하다.
화면의 왼쪽 아래에 두 줄의 작은 글씨로 "시 정해 불탄절 후일(峕丁亥佛誕節後日) 근원 점오선생 목수 사(近園點烏先生沐手寫)"라고 쓰고 '취중락(醉中樂)'으로 보이는 유인(遊印)을 찍었다. 1947년 초파일은 양력 5월 27일이므로 바로 뒷날이라면 28일 그린 것이다. 이 때 김용준은 44세, 아홉 살 아래인 김환기는 35세였다. 제목에서 김환기를 '소노인(少老人)'이라고 한 역설적 조어 또한 그림과 글씨만큼 멋스럽다. 30대 중반인 김환기가 마치 노인네인양 골동을 좋아하므로 노인이라고 하면서 아직 젊은 나이이므로 '어린 노인'이라고 한 것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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