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론새평] 처음 경험하는 디플레이션(deflation)

입력 2019-10-09 19:45:10

오정일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오정일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수출·내수 감소 정부가 메우는 한국

일본형 장기 불황 겪을 가능성 높아

빠지면 탈출 힘겨운 디플레이션 늪

닫힌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 법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헌법을 공부했던 사람들은 헌법재판소 부분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 당시 헌법재판소는 하는 일이 없는 조직이었다. 정당 해산, 대통령 탄핵은 교과서에서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30년 뒤 나는 헌법재판소가 정당을 해산하고 대통령 탄핵을 결정하는 것을 현실에서 보았다. 지금 학생들은 헌법 교과서의 헌법재판소 부분을 열심히 공부한다.

경제와 관련해서 모든 민주적인 정부의 관심사는 두 가지이다. 실업과 인플레이션(inflation). 일자리가 있어야 소득이 생기고 물가가 오르지 않아야 실질적인 소득이 보장된다.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을 더한 것을 고통지수(misery index)라고 할 정도로 실업과 인플레이션은 일상생활과 직결된다. 내가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당시 관심은 실업과 인플레이션이었다. 교과서에 디플레이션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경제가 침체되면 물가가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하락한다. 하지만 교수도 학생도 우리나라에서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물가는 오르는 것이지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헌법재판소가 정당을 해산하고 대통령 탄핵을 인용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얼마 전 통계청은 9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 동월 대비 0.4% 하락하였다고 발표했다. 8월에 이은 두 번째 물가 하락이다. 책으로 공부했던 디플레이션을 현실에서 경험한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농산물과 원유 가격 하락, 복지 정책에 의한 가계 부담 감소를 물가 하락의 원인이라고 하였다. 이는 억지다. 우리나라는 농산물 가격 하락이 물가 하락을 유발할 정도로 농업 비중이 크지 않다. 원유 가격은 안정적이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정부가 복지 지출을 늘렸다고 해서 가계 수요가 감소할 이유도 없다. 물론, 공급이 늘어서 물가가 하락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물가가 하락할 정도로 공급이 늘어난 경우는 없었다. 물가 하락의 원인을 수요 감소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자장면값, 택시 요금이 올랐는데 물가가 하락했다고?" 우리가 상적으로 소비하는 물건은 100개를 넘지 않는다. 그 가격은 올랐을 수 있다. 그러나 물가는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모든 물건 가격의 평균이다. 한 나라의 수요가 전반적으로 감소하면 물가는 하락한다. 물가가 하락하면 싼값에 물건을 살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물건값이 싸다고 해서 물건을 사지는 않는다. 현재 소득이 적거나 앞으로 소득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면 사람들은 소비를 줄인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에 있으면 나라는 디플레이션에 빠진다. 디플레이션은 경기 침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작가 유시민 씨는 베네수엘라와 같은 초(超)인플레이션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당연하다. 베네수엘라는 원유를 팔아서 나라를 운영했으나 원유 가격이 하락하면서 부도가 나자 돈을 찍어서 메웠다. 우리나라는 수출과 내수(內需) 즉, 수요 중심의 경제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수출과 내수 감소를 정부 지출로 메우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형 장기 불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최근 자유한국당이 민부론을 주장하면서 2030년까지 1인당 소득 5만달러, 가구당 소득 1억원을 달성하겠다고 하였다.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2017년 기준 1인당 소득은 3만1천달러, 가구당 소득은 5천700만원이다. 자유한국당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향후 우리 경제가 매년 4.4% 또는 5.2% 성장해야 한다. 외국의 유명 신용평가회사가 예상하는 금년도 경제성장률은 1.8%이다.

당분간 아니 장기간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일을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은 디플레이션이다. 디플레이션은 늪이다. 웬만해선 빠지지 않지만 일단 빠지면 벗어나기 어렵다. 디플레이션은 심리적인 현상이다. 닫힌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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