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항일 결사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단체는 대한광복회였다. 이 단체는 당시 국내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대한광복회가 전개한 의협 투쟁은 1920년대 의열 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책은 독립지사 우재룡 평전이다. 그는 20대 중반 산남의진 연습장 및 선봉장으로 일본과 싸웠고, 30대 초반 광복회 지휘장으로 일본과 투쟁했으며, 30대 중반 광복회 재건과 임정과 연계한 주비단 활동을 했으며, 60대 초반 재건광복회 결성 활동과 암살 위협으로부터 도피생활을 했었다.
1884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한 우재룡은 24세 때 일제로부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년 후 한일합방 특사로 석방됐다. 이후 그는 구한말 의병대장 허위의 수제자인 박상진과 의기투합해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항일투쟁을 재개했다.
특히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광복회는 구한말 의병의 후신이자 1920년대 의열단의 전신이었다. 광복회는 군자금을 모아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하고 의연금 모금에 협조하지 않은 친일 부호들을 처단했으며 세금 수송차량을 탈취하고 헌병 초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우재룡은 이런 활약 덕분으로 37세 때 일제에 붙잡혀 사형을 구형받고 이어 무기징역 선고를 받아 원산형무소에서 투옥생활을 했다. 이어 16년간의 옥고 끝에 감형 받아 석방되었으나 환갑을 넘겨서도 그는 다시 재건광복회 조직을 준비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재건광복회는 곧 해산되었다. 광복을 위해 한평생 투사의 길을 걸어온 우재룡은 해방 후에도 평소 자녀들에게 "아직 독립이 되지 않았다. 통일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독립이다"는 말을 남겼다. 415쪽, 3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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