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매일시니어 문학상] 대상 당선작 - 논픽션 '린호아의 그믐달'

입력 2019-07-05 01:30:00

이성상 전 위성 하이테크 대표이사

뿌연 연기가 혼바산 중턱에서 피어오른다. '꽈 꽝' 소리도 났었지만 사위가 조용하다. 966포대의 포격 연습 같기도 하지만 혹시나 또 붙었나 해서 이내 상체를 일으켜 봤지만 작전 상황은 아니란다. 한낮의 열기를 식힌 해변의 초저녁 바람은 시원함을 더 하는 것 같아 서 중위는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다시 침대에 눕는다.

금세 날은 저물어 서쪽 하늘엔 벌써 초승달이 떠 있다. 밤하늘엔 축포가 터진 듯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비가 멈춘 밤, 야간 매복을 할 때는 달이 없는 것이 효과적이지만 그래도 한밤중 전쟁터에서 보는 달은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푸근하게 만들 수가 없었다.

​ 서 중위는 지금 야전병원에 있다. 포로가 됐었고 탈출 중에 VC로부터 공격을 받아 동료는 죽고 자신도 2발이나 관통상으로 쓰러졌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게 기적 같다. 하마터면 죽을 목숨이었는데 그래도 다행인지 어깨와 다리에 총상이 급소를 피했다. 긴급 헬기로 후송되어 총알 제거 수술과 치료 후 입원치료 중이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월남 중동부 캄란베이에 있는 미 공군 병원으로 전투 중 발생한 외상 부상병들을 집중 치료하는 곳이다. 현재 2주째다. 피습 당시 피를 너무 흘려 의료진들이 많이 우려했다는데 긴급 수술받고 다행인지 이틀 만에 깨어났단다. 깨어나 두리번거리며 처음 눈에 들어온 풍광은 거의 비슷한 총상으로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미군 병사 둘과 월남 군 한 명이 보였었다. 그중에는 한 쪽 다리를 절단한 병사도 있고 한쪽 팔 한쪽 다리를 붕대로만 감은 채 목발로 움직이는 병사도 있다. 그들은 후송을 갈 거라고 했다.

창밖으로는 가까이 남중국해가 푸르게 햇빛에 반짝이며 거대한 푸른 평원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다. 병원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에 위치해 있어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들고 몇 척은 부두에 정박해 있는 걸 볼 수 있다. 선박 주변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크레인은 하역작업이 한창이다. 부두마다 군수품인 듯 야적물들이 엄청나게 쌓여있다. 말로만 듣던 미군 기지 최대 병참부대가 있는 곳으로 모든 보급품들이 더 북쪽에 있는 다낭과 이곳에서 내륙 기지로 출하된다고 했다. 주변 도로 위도 덩달아 바쁘다. 한국군 십자성 부대 트럭들도 장갑차의 칸보이 속에 1번 도로 위로 들어서는 게 보인다.

아직도 악몽 속의 그날이 뚜렷이 기억나지만 생각하기가 싫어 눈을 감는다. 미군 간호장교가 서 중위 옆으로 와 "어떠냐?"라고 깨운다. 다리 통증이 여전하다고 답을 한다. 그랬더니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며 "유 워 럭키!"란다. 총알이 조금만 아래나 옆으로 갔더라면 당신은 이곳에 못 올 뻔했고 얼굴도 멀쩡하고 다른데도 손상은 없으니 너의 여자 친구는 매우 고마워할 것 같단다. 위로랍시고 한 마디 던지고는 웃으며 다른 환자 들 쪽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긴다.

베트남 1번도로 반닝성 인근에서 칸보이 차량에 탄 필자.
베트남 1번도로 반닝성 인근에서 칸보이 차량에 탄 필자.

이 미군 간호장교, 나이도 들어 보이는데 주근깨가 좀 있긴 해도 상당한 미인이다. 조금 살이 찌긴 했지만 자칭 '마라린 먼로'라며 항상 유쾌한 표정이다. 그녀의 그윽한 푸른 눈과 영산홍 같은 입술은 혈기 팔팔한 청년부상병들을 늘 설레게 했고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다.

서 중위는 백인 여자를 코앞에서 보는 건 익숙하진 않지만 왠지 축복 같고 통증도 잠시 멈추는 듯 감사한 마음이다. 병사들에게 이 간호장교는 생김새로 웃음도 주고 다정하기까지 해 병원 생활에 더 안정감도 주면서 회복에 큰 일조를 한다. 내일이 없어 보이는 전장의 병사에게 그 시절, 여자는 위로였고 어머니였고 희망이 되기도 했다.

나른한 오후의 군청 청사 안은 언제나 많은 지역민 군인 공무원들이 찾아 붐비는 시장처럼 시끄럽다. 한 미 월 연락 정교들은 오늘도 몇 군데 자리를 지키고 있고 무전기와 전화도 계속 시끄럽다. 타이피스트 꼬딴은 왁자지껄한 소음에도 언제나 신경 안 쓰는 듯 보고서 타이핑에 열중이다. 닌호아성 성장인 군수는 중령 계급장을 단 군인으로 이곳의 수장이다. 월남인 치고는 체격이 좀 큰 40대의 군수는 언제 봐도 표정이 환하고 사는 게 즐거운 듯 느긋해 보인다. 배가 드물게 복어처럼 나왔고 사복 차림에 옷맵시가 늘 깔끔하다. 주변에서 늘 말을 들어서인지 이 사람도 흔한 부정 축재자 타입 같다.

5월의 이곳 날씨는 이제 우기를 끝내고 서서히 건기 철로 바뀌어 가는 중이다. 정오의 햇빛은 벌써 섭씨 30 도는 넘어가는 듯 군복 상의가 실내에서 땀으로 젖기 시작한다. 미군 위컴 중위도 웃통을 벌써 벗어던졌다. 그는 늘 대마초를 피워대고 있어서 실내 공기가 늘 짚 풀 태우는 냄새 같은 역한 향을 만들고 있다. 씩 웃으며 오늘도 가느다랗게 담배처럼 만 대마초 한 대를 서 중위에게 권하지만 전에 한번 입에 댔다 그냥 그 냄새가 싫어 거절한다. 대신 말보로 한 대를 꺼내 피운다. 그러면 꼬탄은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출입문도 반쯤 열려 있다.

여직원 꼬딴은 우리나라 여중생 정도나 될까 가냘픈 몸매에 아오자이를 입고 있을 때가 많고 잘 웃지도 않고 늘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전쟁 중인 어수선한 나라 늘 시끄러운 청사 내 분위기, 늘 죽고 다치고 멀리 포탄 터지는 소리, 소총 소리 그리고 장갑차 지나가는 소리만 들리는 이 나라, 무슨 해피한 일이 있어서 표정을 밝게 하고 있겠는지 당연할지 모른다. 야간 통금이 해제되는 아침 6시나 되어야 민간인들은 군청이 있는 도심에서 외각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 8시면 다시 시내로 내려와 마련해 놓은 좁은 숙소에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또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해야 하는 실정에 다들 지쳐 있는 듯했다.

1971년 5월 베트남 혼슈산 계곡에서 작전 중인 필자(왼쪽)
1971년 5월 베트남 혼슈산 계곡에서 작전 중인 필자(왼쪽)

베트남 중부 냐짱 위에 위치한 린호아 성 지역은 오래전부터 인구도 많고 산악과 들판이 적당히 혼재한 지역이라 치안이 불안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야간에 자주 출몰하는 VC들의 습격으로부터 주민 보호 차원에서 만든 방침이라고 했다.

" 꼬딴?"

"예스, 루테넌 서. 저 불렀어요? "

"그래, 이 서류작성 좀 부탁해. 급한 거야."

"네, 1 시간쯤 걸려요."

"그래, 조금 더 빨리 좀 해 보고...."

"꼬딴은 어디 사냐? "

"위쪽 쑤안트에 살아요."

"언니도 같이 사냐?"

"언니는 사이공에 있다 지금은 나트랑에 있어요."

"학교는 마쳤냐?"

"예, 그리고 나트랑에서 애들 가르쳐요."

"그래, 언니가 몇 살? "

"왜 자꾸 언니 나이를 물어요?"

"언니가 예쁘드만. 꼬딴보다 키도 크고 나이도 더 먹어서 데이트라도 한번 해 보려고. 하하하."

"언니 애인 있어요."

"거짓말 말고. 소개 좀 해봐?"

"언니 외국 남자 싫어해요."

"왜 그래 다 동양 사람인데. 저기 미국산 고릴라보단 훨씬 인간적이잖아."

"저 친구는 대마초만 피어 대서 꼬딴이 아주 싫어하는 거 내가 알지. 하하."

"그래도 부자 나라 사람이라 좋아할 수 있지만 냄새는 좀 심하네요."

"그래 나도 이 친구 '누린내'는 좋아할 수가 없어. 하하하"

"서 중위님 이거 언제 찍어요? 계속 말 시키면...."

"아, 미안 미안, 부탁해!"

"조금만 기다리세요.."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