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독도 사건 사망자 배상금 6만원

입력 2019-06-24 18:00:00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위문금 3백15원을 가져온 동인동 공민학교 생도를 대표하여 송안자, 이순란 두 여자가 동교 최단진 교원 인솔하에 13일 본사를 내방한 미화가 있다. 비록 적은 금액이나 동인동 일대의 천막촌에 사는 여자들로서 그 생활은 실로 처참한 지경에 있으면서도 넘치는 동족애는 눈물겨운 기금이라 아니할 수 없다.'(남선경제신문 1948년 7월 14일)

하루하루의 삶이 절박한 천막촌의 난민들마저 위문금을 냈다. 바로 독도 조난 동포를 돕는 일이었다. 당시의 표현이 독도 조난 동포였지 항해 중 당한 재앙이 아니었다. 미역을 따다 졸지에 당한 참변이었다. 어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미군 전투기의 무차별한 폭격을 받고 희생되었다. 한 달 보름이 지나서야 위령제를 지냈고 십시일반으로 모은 60여만원의 위문금과 의약품, 대구능금 등이 전달됐다.

1948년 6월 8일. 그날따라 독도 해안의 파도는 잠잠했다. 전날인 7일 오후 울릉도서 독도로 출발한 주민들은 뒷날 새벽에 도착했다. 이미 울진의 죽변이나 강원도 묵호 등에서 온 10여 척의 배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조그만 발동선과 범선을 합해 모두 20척은 되었다. 배를 타고 온 승선 인원만 60명에 달했다. 이들은 아침을 지어 먹고는 바로 미역 채취에 들어갔다.

허리를 펴고 휴식을 취할 즈음인 오전 11시. 비행기 소리가 들렸지만 주민들은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다시 비행기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바로 폭탄이 떨어졌다. 산더미처럼 물이 솟아오르고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주민들은 허겁지겁 바위틈으로 숨어들었다. 그 사이 배가 몰려 있는 곳에도 폭탄이 터졌다.

비행기는 미국의 식별 표시가 보일 정도로 낮게 날며 섬 주변을 폭격했다. 기선 5척과 범선 8척이 가라앉고 14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독도에서 어민들을 향한 미군 비행기의 사격은 그해 들어서도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어부와 어선을 무차별적으로 겨냥해 쏘지는 않았다. 미군은 폭격 사실을 부인하다 뒤늦게 인정했다. 미군의 B29전투기가 어선을 바위로 잘못 보고 연습 폭격을 했다는 게 다였다.

그런 뒤에도 미군의 수습 대응은 안하무인이었다. 현장 조사에서 사망자를 발견하자 위생상 이유로 미군 자신들이 타고 간 배에 싣는 걸 거부했다. 대신에 로프로 매달아 끌겠다는 제안을 했다. 게다가 쥐꼬리만 한 배상금은 기준조차 뒤죽박죽이었다. 경상자가 12만8천원인 데 비해 중상자에게는 1만4천원이 책정되기도 했다. 사망자도 34만원에서 11만원으로 격차가 컸다. 심지어 부상자보다 적은 6만원을 받으라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그때 쌀 한 말이 1천원을 오르내렸으므로 대략 6가마니 값이었다.

독도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묻혀 있다. 희생자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는 추정이 있을 뿐이다. 6'25전쟁일 아침에 동맹국의 얼굴 위로 당시 승선자의 증언이 오버랩되는 이유다.

"폭탄이 떨어질 때 비행기를 향해 배에서 죽을 힘을 다해 태극기를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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