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건너편에는 산책삼아 한번씩 오를 만한 90개의 계단이 있다. 그다지 멋이 없는 콘크리트 계단에 불과하지만, '3·1만세운동길'로 불리는 역사의 현장이어서 뭔가 느낌이 색다르다. 1919년 3월 8일 계성고·신명여고·대구고보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달려간 길을 오르내리다 보면 당시 그 분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곤 한다. 청년학생들의 불타는 애국심과 의기는 우리 같은 소시민을 늘 부끄럽게 한다.
내일이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길이 기억하고 기념할 날이지만,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다. 남북이 분단된 것도 모자라 진보·보수로 갈려 싸움질만 하고 있는 후손들은 선조들의 빛나는 정신을 이어받기에 너무나 부족하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이념·정파에 따라 '진보사관'이니 '뉴라이트사관'이니 하면서 선조들의 업적을 맘대로 재단하는 풍토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에는 친일파만 득실댔다는 시각이나 친일행위는 생존의 방편이라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시각이 대립한다.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다 보니 역사를 편향적, 단편적으로 볼 수밖에 없고, 이는 선조들의 업적을 폄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상류층·지식인 등의 친일 여부도 중요하지만, 보편적인 한국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어떻게 저항했고 어떤 방식으로 투쟁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자기비하에 빠져 있지만, 한국인의 독립투쟁은 전세계가 감탄할 정도였다.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李光耀)는 자서전에서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인은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인의 풍습, 문화, 언어를 말살하려 했지만,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던 한국인은 굳은 결의로 야만적인 압제자에게 항거했다. 일본은 수많은 한국인을 죽였지만, 그들의 혼은 결코 꺾지 못했다.' 이광요는 한국인과 같은 저항 사례는 흔하지 않다고 썼다. 대만, 말레이·싱가포르인들은 이민족 상전들에게 별달리 저항하지 않았고, 일본인이 새로운 보호자가 되어주길 바랐다고 했다.
제국주의 연구로 이름높은 마크 피티는 저서 '식민지-20세기 일본제국50년의 흥망'에서 일본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 만주의 주민 반응이 극명하게 달랐다고 했다.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될 때부터 전쟁 상태였으며, 깊은 증오의 불길이 서서히 격해져 3·1운동으로 다시 활활 타올랐다. 철저한 탄압, 군대의 위압, 지도자의 투옥과 추방에 의해 한국인은 묵종했을 뿐이다. 그외 식민지의 주민 반응은 대체로 온건했다. 만주는 중국인의 대다수가 거의 반발하지 않았다. 반발은 커녕, 재산이 있는 중국인들이 본토의 군벌항쟁에서 벗어나 식민지의 좋은 치안과 안정적인 생활을 바라고 피난해왔다. 대만은 주민 다수가 일본의 지배를 환영하지 않았다고 해도, 소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훗날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6년 경성으로 출발하기전 부인과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이른 감은 있지만, 대한제국 각지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있고 반일감정도 높아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 못한다." 이토가 목숨을 걸어야 할만큼 선조들의 저항은 거세고 광범위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고 칭송한 것도 일제 치하에서 굴하지 않은 한국인의 꿋꿋함 때문이었다. 일본의 악랄한 식민 지배에 순종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한 민족은 한국인 뿐이었다. 역사 해석에 부정적인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현재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가 선조들을 존경하고 자부심을 가질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렇기에 3·1운동 100주년이 소중하고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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