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송대)/스도 요시유키·나카지마 사토시 공저/ 이석현·임대희 옮김

입력 2018-12-26 21:15:04

중국의 역사(송대)
중국의 역사(송대)

'중국의 역사 (송대)'는 일본 고단샤(講談社)가 펴낸 '중국의 역사 시리즈' 제 7권으로 이 책 앞에는 '수당오대' '위진남북조' '진한사' '대명제국' '선진시대' '대원제국'이 출간됐다. 책은 당말 오대의 난을 제압하고, 중국 재통일에 성공한 북송부터 150만 인구를 자랑하는 임안(현재의 저장성 항저우)을 수도로 번영을 구가한 남송까지 송대 300여년 역사(960∼1279)를 분석하고 있다.

◇ 중국 역사 대변혁기, 문화예술 눈부신 발전

송대는 중국 역사상 중요한 변혁기로 평가된다. 관료정치체제의 확립, 형세호(形勢戶) 계층의 대두와 사대부 사회로 특징되는 새로운 서민사회의 등장을 비롯해 상업과 주자학, 인쇄술, 문학, 회화, 도자기 등 문화와 과학, 예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시기다.

형세호는 송나라 때의 지방 호족을 일컫는 호칭으로 이들 중에는 과거에 급제해 관료가 된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송나라 지배 계층을 형성했으며 문화적으로 '송학'으로 대표되는 성리학과 과학기술 분야에서 큰 진전을 이룩했다.

이 책은 새로운 권력체제와 문화예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부국강병책으로 송대 전 시기에 걸쳐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왕안석 신법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까지 세세하게 살펴본다.

◇ 문인관료체제·악정과 이민족 방어로 재정악화

송나라는 강력한 황제권력에 의한 관료정치체제를 확립한 제국이다. 이 체제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문인관료에 의해 지탱되었다. 하지만 북방의 요(遼)와 서하(西夏), 금(金)의 침입을 방어하느라 재정은 악화되었고, 대지주 및 대상인과 결탁한 관료의 악정은 당쟁을 불러왔고 북송을 멸망에 이르게 했다.

화북에서 쫓겨나 강남에서 다시 흥기한 남송은 금과 화약을 체결한 후 개발에 박차를 가해 남송의 도시들은 그야말로 공전의 번영을 구가하고 주자학과 인쇄술 등 문화와 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 농업생산제고·상업경제 발달…지폐 등장

송대사는 정치 제도적으로 대단히 복잡하고, 사회경제적으로도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어 그 역사를 한눈에 파악하기는 어렵다. 제도적 측면만 보더라도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다, 신종 원풍(元豊) 연간(신종황제가 '원풍'을 연호로 썼던 기간, 1078년 ~ 1085년) 이전과 이후가 다르며, 남송대에서도 그 변화는 계속되었다. 국제관계도 요, 금, 서하, 고려, 몽골에 이르기까지 실로 여러 국가들과 교섭과 대립을 반복했다.

사회적으로는 이전의 귀족 대신 형세호 계층이 대두하고 사대부 사회가 성립하면서 새로운 서민사회가 등장하고, 경제적으로는 지주전호제(토지 소유주인 지주와 이를 소작하는 전호가 연결된 토지소유형태.)가 일반화되고, 농업생산력의 제고, 상업경제의 발달, 지폐의 등장 같은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 혁신과 한계를 동시에 가졌던 왕안석 신법

왕안석의 신법(新法)은 중국 역사에서 행해진 여러 개혁들 가운데 후대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치열한 정책이다.

송나라는 건국 후 100년 정도 지나면서 사회적, 경제적 폐해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재정 적자였다. 과거를 통해 등용된 많은 관료들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 서하西夏(1038~1227)와 7년 전쟁 후 증대되기 시작한 군사비가 주원인이었다. 지출의 70-80%가 군대를 유지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경비였다.

왕안석은 신법으로 민간영역에 대한 국가개입을 강화해 재정 수입과 규모를 늘리는 한편 대지주와 대상인에 맞서 소농과 소상인을 보호하고자 했다. 왕안석의 개혁 목적은 재정을 회복하는 것이었지만 단순히 세수를 늘리는 차원을 넘어 재정 및 행정개혁이자 사회개혁이었다.

신법은 재정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농민의 부담 경감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고, 대다수 농민들이 신법에 반대했다. 신법이 혁신성과 한계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요즘 말로 하면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튀어나오는 '풍선효과'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 굴욕 외교냐,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외교냐

송나라의 국제관계는 중국 역사의 여러 통일국가 중에서도 특히 굴욕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북송은 이민족을 막기 위해 막대한 군비를 확보하는 대신 이민족들과 형제관계(요나라), 군신관계(금나라)를 맺어 평화를 확보했다. '화평을 위한 타협'은 당대만이 아니라 후대에도 비겁자,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힘으로 맞서다가 많은 피를 흘리고, 망한 나라들도 많다. 어떤 면에서 송나라는 타협으로 평화를 얻고, 그 평화 속에서 번영을 구가하는 쪽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북방의 강적과 맞서야 했고, 끊임없는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송나라가 국내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며 경제와 문화를 번영 시킨 것은 송나라 외교의 탁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송나라의 화평정책을 돈으로 평화를 산 굴욕으로 비판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송대를 서양의 르네상스와 비유할 만큼 높게 평가한다. 어느 한쪽 면만 보고 송나라를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송대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너무 많고, 내용 역시 간단치 않다.' 며 '역사 전공자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이런 점을 음미하며 일독할' 것을 권한다. 456쪽, 2만2천원.

▶ 지은이 스도 요시유키(周藤吉之)와 나카지마 사토시(中嶋敏)

스도 요시유키(1907~1990)는 일본의 송대사 나아가 중국사 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연구자 중 한 명이다. 주요 저서로 '中國土地制度史硏究(중국토지제도사연구)', '宋代經濟史硏究(송대경제사연구)' 등이 있다.

나카지마 사토시(1910~2007)는 송대사 관련 여러 자료들을 번역하는 등 송대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 '東洋史學論集(동양사학논집)', '同續編(동속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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