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재의 대구음악유사]능금노래

입력 2018-10-29 17:24:38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사과나무는 원래 우리나라 산야에 자생하고 있었는데 '능금'이라고 불렀다. 11세기 말 고려 의종 때 나온 ‘계림유사’에 임금(林檎-능금의 어원) 이란 이름으로 최초로 문헌에 등장한다. 그 외 학설로는 조선 중기 때 중국 청나라 사신들이 올 때 '빈과(蘋果)'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숙종 때 서울 북악산 자하문 일대에 20만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대구에서는 '산 능금'은 알이 작고 맛도 시어서 먹지를 못하는 산과일이었다. 1960년대까지 서울도 세검정 냇가에 가면 산 능금이 여러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사과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방인데 지금도 카자흐스탄에는 그 후손인 야생의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사과가 비단길을 따라 중국으로 간 것은 '능금'이 되었고 유럽으로 가게 된 것은 '사과'가 되었다.

사과의 품종은 2천500여종으로 색깔은 빨간색으로 부터 초록색, 노란색 등이 있으며 크기는 대추만한 것부터 핸드볼만한 것까지 다양하다. 대구서는 사과라는 말은 요즘에나 쓰지 옛날에는 능금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대구사과'의 원조는 1899년 동산병원 초대원장인 미국인 존슨이 미주리에서 '미주리', '스미스사이다', '레드베아밍' 등 3품종 72그루의 사과나무를 들여와 남산동 병원 사택에 심은 것이다. 대부분 죽고 미주리 품종만 남아 있던 것을 1998년 2월 28일 현재의 동산의료원 자리로 옮겨 심어 놓았다.

한편 '대구 능금'은 1905년 무렵 일본인들이 칠성동과 침산동과 그리고 금호강을 따라 반야월에 심은 것이 시작이다. 존슨이 갖고 온 사과는 대구에 본래 있던 산능금과 비슷하여 크기도 작고 먹을 수도 없는 관상용이었다. 꽃이 곱고 열매가 예뻐 대구 사람들은 흔히들 '꽃 사과'라고 불렀다.

어떤 이들은 동산의료원 꽃사과를 개량해서 먹는 과일 대구 사과가 되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동산병원 사과는 화초의 일종일 뿐 유명한 과일인 대구 능금과는 별 관계가 없다. 을사늑약 무렵 일본인들이 들여온 능금이 크고 먹을 수 있는 과일 대구능금(소위 대구사과)의 원조가 되는 것이다.

1949년 농림부에서 추천 장려하여 능금을 주제로 한 물산장려의 건전가요가 만들어져 토박이 대구인들은 어릴 때 자주 불렀다.

"능금, 능금 대구 능금 이 나라의 자랑일세. 너도 나도 손을 잡고 힘을 다해 배양하세. 에에헤 좋고 좋다. 에에헤 좋고 좋다. 능금, 능금 대구 능금 능금 노래를 불러보세.-'대구 능금의 노래'. 이응창 작사, 권태호 작곡.

불로동에서 불로천을 거슬러 팔공산 쪽으로 올라가면 도동 측백나무 숲이 나오고 도동 약수터가 가까워지면 길을 좁아지고 산은 깊어진다. 막힐 듯한 길을 돌아서면 갑자기 넓은 들이 나온다. 그래서 이름이 평광동(平廣洞)이다. 여기 팔공산 한 쪽 기슭에서 마지막 대구 능금이 남아 숨을 할딱거리고 있다.

대구 사람들은 사과와 능금을 구별하지 않는다. 전부 능금이라고 부른다. 능금은 원래 대구에 있었던 나무이고 사과는 외래종이라고 생각해서 통틀어 능금이라고 부른다. 벽창우(碧昌牛) 같은 대구 고집이다. 대구경북 사과협동조합이 아니고 능금협동조합이라고 부른다. 칠성시장의 사과 전문시장도 이름이 능금시장이다. 우리나라가 못 살 때 대만의 바나나와 물물거래해서 전국민에게 바나나를 맛보게 했던 대구능금이다. 생자필멸, 대구능금은 없어졌다.

권영재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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