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북한에 밀려 곧 망하게 생겼는데도 철없는 도시의 아이들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전쟁이 나니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외국 물자들을 구경하게 되고 먹을 것도 생기니 신이 났다. 길은 온통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팔도 조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말을 쓰며 다니는 것도 신기하고 더구나 서로 다른 복장에다 얼굴이 흰 군인, 검은 군인들이 길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것도 큰 구경거리였다. 이들은 길 걷다 크레커, 초콜릿, 바둑 검 등을 던져 주는데 동네 아이들은 모이 본 닭처럼 땅에 머리박고 주워 먹기에 정신이 없었다. 계집애들이 고무줄 할 때는 우리 말 동요를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데 일본노래, 동요, 군가들을 짬뽕해서 불렀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천만이냐?"서 부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도 자주 불렀다.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동물에게는 '명기(銘記)'라는 게 있다. 어릴 때 보고 들은 모양이나 소리는 각인(刻印)되어 평생 간다는 말이다. 지방 말을 배운 뒤는 서울 가도 서울말을 못한다. 일부러 외국 말처럼 배워야 서울말이 된다. 때를 놓친 수신(修身)도 그냥은 회복이 안 된다.
대봉동에 있던 대구보충대(일제시대 '가다쿠라' 제사공장 자리)에서 훈련을 마친 신병들은 도지사 관사 앞을 통과하여 16헌병대를 경과하여 국립극장(한일극장)을 지나 우회전하여 중앙통으로 간다. 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선의 부대로 가기 위해서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 치는 애국의 깃발, 넓고 넓은 사나이 마음, 생사고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보아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을, 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용진가)가 자주 부르는 군가였다. 아무 표정도 없고 감정도 없이 부르던 그 행렬이 아직 기억이 난다.
그 때의 많은 광경들이 나의 머리속에 명기가 되어 있다. 군인들이 총을 어깨에 메고 군가를 부르며 행군을 하면 보기만 해도 신이 나고 멋있게 보인다. 그러나 그 때는 이런 행군이 거의 매일 진행이 되다보니 군악대도 없고 맥 빠진 군가만 들으니 패잔병 보는 기분이었다. 그 때 군인들을 싸우러 가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일하러 가는 인부들 모습이었다.
철없는 나는 삼촌들이 어디 엔가에 가서 죽는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도 높고 물도 맑은 곳에 태어나 이런 비극적이고 메마른 광경을 보지 않고 자랐으면 나도 남을 미워할 줄도 모르고 살아 있는 것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순진무구한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앙팡 테리블로 태어난 탓에 평생 이 나이까지도 남을 용서할 줄도 모르고 내가 누군인지도 모르며 살고 있나 보다.
용진가는 가사는 한국군 말고도 가사는 달라도 같은 음조로 독립군도 불렀고 북한에서도 불렀으며(유격대 행진곡)-현재도 행사 때 연주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북한 갔을 때 순안 비행장행사에도 이 노래가 연주되었다. 그들의 가사는 이렇다.
"동무들아 준비하자 손에다 든 무장, 제국주의 침략자를 때려부시고, 용진 용진 나아가자 용감스럽게, 억 천만 번 죽더라고 원쑤를 치자."
아이러니한 일은 이 노래는 1908년 일본의 가미나가 료케츠(神長瞭月)가 작곡한 유행가 '하이카라부시'라는 것이다. 전주에 있는 신흥고등의 교가도 바로 이 노래의 곡조를 쓰고 있다고 한다. 독립군가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요동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 하옵신,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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