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박시윤
섬마을 외딴집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장대비가 쏟아지면, 붉은 양철 지붕은 참 요란하였지요. 빗소리에 밤새 잠을 설치고, 다음 날 비가 그치면 방문을 활짝 열었어요. 시야를 멀리 뻗으면 파도 소리와 보이는 건 망망대해뿐이었어요. 큰 바다와 집 사이에 자그마한 폐교가 있었어요. 온통 잡초가 자리를 튼 운동장을 나는 천천히 걷곤 했죠. 녹슨 그네며, 화단이며, 뒤란이며 구석구석 살피는 걸 즐겨 했지요. 주인 없는 고양이가 뒤란 어느 틈에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비에 젖은 유기견이 바들바들 떨며 나를 경계하다 달아났죠. 나는 종종 개에게 먹을 것을 덜어주곤 했지요. 나는 알아요. 그 개가 내 집 앞을 서성이다 가곤 했다는 걸요.
화단에서 만나는 꽃들은 참 반가웠습니다. 기름지게 핀 수국이며, 해국이며, 과꽃, 채송화가 앞다투어 피고 졌습니다. 돌배가 혼자 주렁주렁 열리고, 버찌 열매는 흑비둘기가 수시로 날아와 먹고 갔습니다. 나는 가족이 그리울 때면 더 자주 폐교를 서성였습니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봉숭아였습니다. 여름이 떠나갈 이맘때쯤 봉숭아는 그리움, 그 자체였습니다. 어렸을 적 우리 집 마당에, 옆집 마당에, 건넛마을 집집마다 마당에, 내 발길 닿는 곳곳마다 피어 있던 그 봉숭아입니다. 나는 섬에서 봉숭아를 보며 육지를 그리워했고, 그리고 지금 봉숭아를 보며 육지에서 다시 섬을 그리워합니다.
흙 한 줌 없는 이 삭막한 도심의 집에서 섬 기슭 빨간 양철 지붕 그 집을 그리워합니다. 봉숭아 몇 닢 따다 곱게 짓이겨 손톱 위에 올려놓고, 풀 냄새 속에 고향을 그리워하고, 청춘의 도심을 그리워하고, 그리고 마흔의 섬을 그리워하고, 여리기만 했던 지나간 모든 시간을 그리워합니다. 봉숭아는 그리움의 꽃일까요? 고려시대 충선왕(忠宣王)이 몽골에 끌려갔을 때, 함께 간 시녀가 조국을 그리워하며 봉숭아물을 들인 것을 보고, 마음을 다스리며 견뎠다 합니다. 짓이겨 쥐어 짜낸 그 새빨간 꽃물을 작은 손톱에 올려 두고 내 유년은 참 곱게도 부유했지요. 더 바랄 것도 없던 딱 그만큼의 행복이 봉숭아 꽃물 발갛게 든 작은 손톱 위에 오래오래 머물렀다는 걸 기억합니다. 스물이 되던 해엔 새하얀 첫사랑을 기다리며 오지도 않을 누군가를 뜨겁게 기다려도 보았지요. 봉숭아 꽃물을 들인 사람을 만날 때면 어떤 그리움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 괜스레 반가웠지요.
어느 집 화단에 봉숭아가 피었기에 몇 송이 얻어서 돌아온 저녁입니다. 곱게 찧어 손톱 위에 올려 두고 밤새 지나간 것들을 그리워할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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