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없이 맑고 순수한 사람을 만났다. 어려움이라고는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그렇기에 세상의 좋은 모습만 바라보는 당신.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고, 더 높은 자리에 있지만, 한낱 나보다 이상적이고 순진하다 생각했다. 당신은 편하게 살아온 덕에 이 바닥의 추악함을 아직 보지 못했다. 그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다. 착하다는 말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니게 됐다.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가엾음의 탄식일지도. 한때는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저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이제는 대나무로도 부족해 강철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그 약간의 흔들림조차 용납하기 싫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내가 너무도 유약한 것 같을 때가 있다. 별 것 아닌 일에 상처받고 혼자 아파하기에.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처럼 위악(僞惡)을 방패막이로 삼아 의지할 때가 있다. 혹자는 사회생활을 하면 성악설을 믿게 된다고 했다. 호의를 권리인 줄 아는 세상이다. 내가 할 일은 밀어내고 타인의 공을 가로채며, 내가 잘하기 보단 타인을 짓밟음으로써 위로 올라가는 쉬운 길을 택하려 한다. 무시당하지 않도록, 음해하는 자가 있다면 징벌할 수 있도록 내게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상처를 주는 쪽이 되고 싶다.
그럼에도 위선(僞善)의 가면을 놓지 못하는 인간의 표리부동함이란! 위선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거부할 수 없다. 상처받기 싫고 이기적으로 굴고 싶지만, 동시에 그와 같은 이유로 비난 받고 싶지 않다. 세상을 살다 보면 나는 종종 방관자가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자신과의 타협 하에 말이다. 방관자만큼 비겁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정무적인 판단이란 그런 것이다. 옳고 그름이 아닌,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여론에 환영 받을 수 있는지는 따지는 것이다. 세상에 용기를 냄으로써 비난의 최전선에 내몰렸을 때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못하기에.
언제부터인가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기 시작했다. 나는 단정 지어 말하지 않는다. 지금의 생각도 삶을 겪고 겪어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과 같이 순수한 열정이 넘쳤던 내가 위선의 갑옷에 숨어살게 된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좋은 사람은 아니더라도 굳은 살이 생긴 지금이 스스로를 위해 더 좋은 것 같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만은, 꺾이지 전까지만 흔들릴 수 있기를.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김정숙 소환 왜 안 했나" 묻자... 경찰의 답은
"악수도 안 하겠다"던 정청래, 국힘 전대에 '축하난' 눈길
원자력 석학의 일침 "원전 매국 계약? '매국 보도'였다"
김문수 "전한길 아닌 한동훈 공천"…장동혁 "尹 접견 약속 지킬 것"
조국 '된장찌개 논란'에 "괴상한 비방…속 꼬인 사람들 얘기 대응 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