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개신교 인사 중심으로 계성학교, 대구고보, 신명여학교 학생 등 1천여명 참여
4월 말까지 6차례 이어지며 2만3천400명 참가…사상자 1,135명 달해
1919년 3월 8일 낮 대구 서문시장. 전날 내린 봄비에 시장바닥은 온통 질퍽했지만 다행히 하늘은 활짝 개어 있었다.
토요일을 맞아 수업을 일찍 마친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 40여명이 조용히 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려 교복을 벗고 지게를 지거나 상인처럼 옷을 갈아입은 채였다.
이어 신명여학교 교사와 학생 50여명도 동산병원 언덕길을 내려와 조용히 군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후 2시가 되자 대봉동에서 출발한 200여명의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교복 차림으로 뛰어왔다. 일본 경찰들은 몰려드는 학생들에게 가차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막아서기도 했다.
일제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서문시장 소금집 앞 빈터에는 1천여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지금의 섬유회관 맞은편 실골목 입구다. 군중 속에 섞여있던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전도사가 쌀가마니로 급조한 단상에 올랐다.
"대한독립만세!" 이만집 목사의 절규가 시장 안에 울려퍼졌다. 학생들과 군중들도 하늘을 찌를듯한 함성으로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대구경북 3ㆍ1운동의 역사적인 출발이었다.
개신교 인사들과 학생들이 주축이 된 대구의 3·1운동은 8일 서문밖시장에서 시작됐다. 일제의 강경 진압으로 규모는 점점 줄었지만 두달여 동안 6차례에 걸쳐 이어지며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다.
◆ 서울부터 번진 만세운동의 불씨,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대구의 3·1운동은 대구 출신으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중 한 명인 이갑성이 불을 지폈다. 그는 1919년 2월 24일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를 방문, 당시 개신교 지도자였던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전도사를 만났다.
이갑성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국제사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할 것이며 이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 곳곳에서 독립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대구에서도 독립 만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만집 등은 만세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고 봤다. 또 지금의 남구 이천동 주한미군 캠프 헨리 자리에 주둔 중인 일본군 보병연대 탓에 민간인 희생이 클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나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동참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3ㆍ1운동의 불길이 확산되던 3월 3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이 이갑성을 대신해 독립선언서 200장을 이만집 목사에게 전달했다. 이만집과 김태련,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 등은 장날인 8일 오후 서문시장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또 계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에 소식을 알리며 동참을 유도했다.
닷새 뒤, 대구에서 마침내 첫 독립만세 함성이 터졌다.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는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방향으로 행진했다. 일본 경찰은 대구경찰서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으로 시위대를 겨누며 위협했지만 사태 악화를 우려해 발포하진 않았다. 시위 행렬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만경관을 지나 지금의 종로인 경정통을 지났다.
만세 행렬이 동성로를 거쳐 옛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 앞에 이른 것은 오후 3시 30분쯤. 그곳에는 기마헌병은 물론 무장한 일본군 보병 부대가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 군경의 가혹한 진압이 시작됐고 진흙밭 거리에 유혈이 낭자했다. 시위대는 해산됐고 157명이 붙잡히며 대구경북 첫 만세운동이 멈춰섰다.

◆ 각계각층 참여 2개월 간 이어진 만세운동 "219명 사망, 916명 부상"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운동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이틀 뒤인 3월 10일에는 김영서 등이 남문밖시장(현 염매시장) 장날을 기회로 다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오후 4시쯤 시작된 이날 만세운동은 일제 군경에 해산되기 전까지 1시간여 동안 200명의 군중이 동참했다.
주동자 중 상당수가 체포되며 막을 내릴 것 같던 만세운동은 동화사 지방학림의 힘으로 되살아났다. 이들은 3월 30일 대구 남문밖시장을 2천여명의 만세소리로 가득 채웠다. 이후로도 4월 15일 수성면 대명동(현 남구 대명동), 4월 26일과 28일에는 공산면 미대동(현 동구 미대동)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대구에서만 6차례 걸쳐 2만3천400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이 중 219명이 사망하고 916명이 다쳤다고 기록했다. 일제 군경에 검거된 이들만 3천296명에 이르렀다.
8일 서문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한 71명과 10일 남문 밖 시장 만세운동 참여자 9명 등 95명은 징역 6개월에서 3년의 실형을 받았다. 목사와 장로, 전도사 등 개신교 인사와 교사, 학생이 다수였지만 농민, 상인, 노동자도 26명에 달하는 등 비교적 다양한 계층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김희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은 "만세운동이 비록 자주독립으로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이는 일본이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어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이 의제가 되지 못한 게 결정적이었다"며 "지역민들이 일제의 탄압을 딛고 자주독립의 의지를 세계에 떨친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하고 의미를 되새길 일"이라고 했다.
※참고자료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경북독립운동사
계성학교 계성100년사
경북고등학교 경맥117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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