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의 한시 산책] 악보 밖의 곡을 타니(최항)

입력 2018-06-02 05:00:00

이토록 정취가 넘치는 시를 ‘깡패’ 최항이 지었다고?

 

뜰 가득 깔린 달빛 연기 없는 촛불이요 滿庭月色無烟燭(만정월색무연촉)

자리에 드는 산 빛 초대 않은 손님일세 入座山光不速賓(입좌산광불속빈)

게다가 솔바람 소리 악보 밖의 곡을 타니 更有松絃彈譜外(갱유송현탄보외)

좋을시고, 이 흥취를 남에게 어찌 전해 只堪珍重未傳人(지금진중미전인)

 

이 작품은 과거 오랫동안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칭송되고 있는 최충(崔沖:984~1068)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근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무신집권기 최씨정권의 계승자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최항(崔沆: ?∼1257)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최항은 정치가로서 부도덕했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중세적 규범과 질서를 완전히 이탈했던 패륜아였다. 하지만 그가 남긴 시들은 참으로 기이하게도 세속적 속물성을 초월한 드높은 아취와 격조를 보여주고 있다. 위의 시가 바로 그 대표적 사례다.

‘뜰 가득 깔린 달빛’을 ‘연기 없는 촛불’에, ‘자리에 드는 산 빛’을 ‘초대하지 않은 손님’에 각각 비유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이 시는 은유적 수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달빛과 산 빛이 조성하는 몽환적 분위기와 흥취 탓인지, 수사에서 작위적인 기교를 느낄 수가 없다. ‘어느 날 저녁, 홀연히 솔바람 소리 ㆍ대 바람 소리가 저절로 울려 퍼지자 자신도 모르게 이 시를 지었다’는 기록도 의도적인 조탁이나 인위적 수사가 작품 창작에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었음을 의미한다. 쏴아~ 쏴아~ 불어오는 솔바람 소리가 악보 밖의 음악, 즉 인위적인 악보를 초월한 대자연의 음악을 연주한다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작품 전체가 달빛, 산 빛, 솔바람 소리 등 시각적ㆍ청각적 이미지에 의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세속을 초월한 청정하고 자연스런 이미지의 공간을 이루고 있으며, 작중 화자도 그 공간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대상 세계가 아무런 조건 없이 합일되어야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세계다.

아니, 뭐라고? 이토록 아취가 넘치는 시를 깡패 최항이 지었다고? 그렇다. 최항이 지은 것이 맞다. 최항이 지었다고 해서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야 할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최충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을 때 빼어난 한시로 칭송되던 작품이, 최항의 작품으로 밝혀졌다고 해서 빼어난 한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게다.

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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