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도 창의군 대장 왕산 허위-경상도 서북지역에서 창의 모색

입력 2018-05-31 11:34:16

왕산 허위가 첫 의병을 일으킨 김천 금릉향교. 이곳에서 금산ㆍ개령ㆍ지례ㆍ상주ㆍ선산 등지의 유생으로 구성된 김산의진을 결성했다. 구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왕산 허위가 첫 의병을 일으킨 김천 금릉향교. 이곳에서 금산ㆍ개령ㆍ지례ㆍ상주ㆍ선산 등지의 유생으로 구성된 김산의진을 결성했다. 구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 1896년 을미의병 소식을 듣고 왕산 허위는 유생들을 모아 김산(현 김천) 금릉향교에서 첫 의병의 기치를 들었다.

안동과 김산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일제에 항거했다.

김천 직지사에서 의병을 다시 출병시킨 허위의 김산의진은 충북 진천까지 진격했지만, 고종의 밀서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청송 진보로 들어갔다.

임금의 밀지를 받은 허위는 울분을 머금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허위의 첫 의병은 실패로 돌아갔다.

왕산 허위가 첫 의병을 일으킨 김산지역(현재는 김천) 표지석. 구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왕산 허위가 첫 의병을 일으킨 김산지역(현재는 김천) 표지석. 구미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경상도 서북지역에서 창의를 모색

1896년 1월 20일 안동을 필두로 경상도 지방 각처에서 의병부대가 조직돼 창의했다.

경상도 서북지방인 상주와 선산, 성주, 김산 등지의 양반 유생들도 창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김산지역에서는 양반 유생 여영소·여중룡 등이 들고 일어났으며, 상주와 선산지역에는 허위·조동석 등이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의 공포에 자극받은 유생들이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영소와 여중룡은 김산지역의 대표적인 양반으로 이 지방의 여론을 선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창의에 자극을 받고 그해 12월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렸다.

그러나 이들의 의지대로 창의는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관청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지에 주둔하고 위세를 떨치던 일본군의 탄압에 크게 위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안동·예안·진주 등지에서 창의를 독려하는 격문과 통문이 계속 날아들었다.

허위와 조동석·이기찬·강무형 등은 상주와 선산지역 유생들과 상주에서 창의를 준비했다.

그렇지만 허위 역시 여러 번 논의만 거듭했을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허위는 김산지역의 통문을 보고, 유도섭을 급히 파견해 함께 창의를 하자고 했다.

유도섭은 여영소를 만나

"우리 쪽도 상주에서 창의를 하자고 한 것이 몇 차례이지만 하려는 일과 뜻이 맞지 않아 거사를 이루지 못하고 김산에 머물고 있습니다. 준비된 포수는 30∼40명뿐이지만, 개령읍에 사는 허위경이 포정(砲丁) 수백 명을 보내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포정들이 모두 모이면 오늘 밤 김산읍으로 들어가 군기(軍器)를 취하여 황간으로 가서 거사를 하면 인근 고을에서 모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와 더불어 동심동사(同心同事)하여 합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허위도 격문을 각 지역에 보냈다.

'나라에 환란이 있을 때에는 혹 소모(召募)하고 혹 창의(倡義)해서 마침내 안정토록 하는 것이 상하 각자가 해야 할 도리이다. 지금 왜적이 우리나라 안에 발을 내리고 앉았음이 이미 두어 해나 되었건만 의리를 좇아서 응모하는 자가 이와 같이 보잘 것 없다. 팔도 안에 참으로 의용(義勇)과 지략(智略)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겠는가! 오백 년 종사의 위태함이 조석에 있고, 삼천리 강토는 강탈당할 염려에 처해 있다. 그윽히 생각컨대 궁중에 발생한 변고와 신민의 위급함은 마음이 아프고 뼈가 떨려서 죽고 싶을 뿐이다. 곧 손으로 그놈들의 살을 뜯어 먹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위(蔿)는 하나의 쓸모없는 유사(儒士)이다. 지혜(智慧)와 도량(度量)이 본래부터 사람 수효에 참여할 수 없고 간과진오(干戈陳伍)에 대한 일은 일찍이 들은 바도 없었다. 그러니 이 날에 이 일을 일으킴이 어찌 타당하오리오만, 충분(忠憤)에 격동(激動)한 바 되어, 손을 내리고 바라만 볼 수 없기에 기필코 이 도적의 괴수를 소탕코자 하는 바이다. 바라건데 여러분은 같은 소리로 응모하라, 비록 몽둥이와 허리를 가지고도 달려들어 공격해서 용기를 도우면, 적들도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이정(里正)과 촌장(村長)이 장정을 거느리고 형세를 도우면 천만다행하겠다.'

허위의 격문에 하늘도 감동했을까!

각 고을에서 의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병들이 몰려들기는 했지만, 허위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군량이 문제다.

결국 군량은 김산지역의 부호들로부터 수집해야 하기 때문이다.

왕산 허위가 첫 의병을 결성했지만 실패하고, 두 번째로 김천 직지사에서 의병을 규합했다. 김천시 제공
왕산 허위가 첫 의병을 결성했지만 실패하고, 두 번째로 김천 직지사에서 의병을 규합했다. 김천시 제공

◆의병의 선봉장 김산의진

허위와 이기찬, 여영소, 여중룡 등은 한자리에 모였다.

그렇지만 서로의 주도권을 놓고 힘겨루기가 심했다.

김산의진은 창의 과정에서 많은 진통을 겪었다.

산고의 고통 속에서 1896년 3월 29일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창의했다.

김산의진은 '김산창의대장(金山倡義大將)'이란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진용을 정비했다.

김산의진은 금산·개령·지례·상주·선산 등지의 유생에 의해 연합의진으로 금릉향교(현 김천시 교동)에서 결성됐다.

김산의진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충만했다.

이들은 다음 날 대구부로 진격하기 위해 금릉향교를 출발했다.

3월 31일 저녁때쯤 김천 지례읍에 도착해 진을 쳤다.

4월 1일 김산의진은 지례의 사문(四門)에 방을 붙여 군량과 군병을 모집했다.

지례현감은 관포군을 의병에 합류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때 김산의진은 대구에서 파송된 경상감영의 관군 수백 명이 김천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관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김산의진 의병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산의진은 조직·군비·전략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군이 진격해오자 김산의진 의병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김산의진은 유생들로 주축이 돼 조직력과 전투력이 약해 자멸이 불가피했다.

이처럼 전투다운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하고 김산의진은 진주·안의·황산 등지로 흩어지고 김천지역은 관군이 장악했다.

허위는 4월 7일 상주·선산 등지로 통문을 다시 돌렸다.

흩어졌던 김산의진이 다시 김천 직지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허위는 참모장이 되고, 벽도 양제안은 중군이 됐다.

허위는 수일에 걸쳐 군량과 군기를 모집하고 흩어졌던 포군 100여 명과 유생 80여 명을 규합했다.

김천 지례 홍심동에 진을 쳤다.

4월 17일 경상감영의 관군들이 김천 구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구성은 지레에서 지척에 있다.

허위가 거느리고 있는 수백 명과 중군 양제안의 수하 백여 명은 김천 구성면 도곡촌에서 경상감영 관군과 만났다.

이 전투에서 김산의진은 힘도 못 써보고 또다시 패했다.

관군이 쏘는 몇 차례의 포격에 괴멸했다.

허위와 이기찬·여영소·여중룡·이주필·양제안 등 의병진 지도부들은 홍심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홍심동이 천혜의 요새였지만, 관군의 파죽지세에 방어는 거의 불가능했다.

관군과의 첫 전투에서 대패를 한 김산의진은 무주로 이진을 했다.

병졸은 100여 명이 불과했고, 양제안이 부상병을 업고 갈 정도였다.

사기와 군율은 완전히 붕괴했다.

영동을 거쳐 황간에 도착한 허위 부대는 호서지방에서 활동하던 의암 유인석과 합류하기로 했다.

충청도 보은, 괴산, 청주, 음성을 거치는 동안 관군과 32차례나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양제안은 총상을 입었다.

힘겹게 관군과 전투를 벌이던 허위의 잔여세력은 충북 진천에서 고종이 보낸 국왕의 밀지(密旨)를 받았다.

그 내용은 '의병을 급속히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허위 등은 분함을 억누르고 군대를 해산했다.

이렇게 허위의 첫 의병은 실패로 돌아갔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