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재의 대구음악遺事<유사>♪] 약장수 익살 떠는 곳엔 반드시 노래가 있었다

입력 2018-04-27 00:05:00

우리나라가 못 살 때 길거리 가짜 약장수들이 판을 치고 다녔다. 거친 음식에 속을 버려 위장약이 많이 팔렸고 노동에 골병들어 관절통약이 또한 인기였다. 나라 살림이 좀 나아지면서는 과음해 나빠진 간 치료약, 일 때문에 골치 아파 두통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런 변천 가운데서도 남자들의 양기를 돋운다는 약은 늘 인기를 끌고 있었다. 떠돌이 약장수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모두가 의료법 위반으로 구속되어야 할 사람들이지만 당시는 반가운 손님들이었다. 약장수들이 익살을 떠는 곳에는 반드시 노래가 있어 그들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칠성시장 옆 신천변에는 광목으로 가리고 단을 만들어 극장식 약장수 무대가 자주 섰다. 상설 무대는 아니었지만 한번 시작하면 며칠씩 공연을 하였다. 그곳의 레퍼토리는 주로 국악이다. 분위기는 요즘 KBS의 국악무대와 흡사했다. 가수 혼자 나와 창을 하기도 하고 떼로 나와 춤추며 타령을 불렀다. 장구는 우리 악기인데도 가요 반주에도 기막히게 어울렸다.

가끔 목포의 눈물이나 비 내리는 고모령 같은 신식가요도 맛보기로 들려주는데 장구로 반주를 하면 모두들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대구는 기생학교가 몇 개 있었고 경상감영에는 전국 명창을 뽑던 예향이 열렸기에 귀명창들이 많아 약장수 공연이라도 내용이 시원찮으면 청중이 집에 갔다. 그래서 노래들이 수준이 높았다. 파는 약은 만병통치약이다. 큰 병에 물약을 넣어서 파는데 속병, 카타코리 통증, 대하, 하초부실, 화병 등 안 듣는 병이 없는 명약을 팔았다.

교동시장이 정식 시장이 못 되고 양키시장으로 불리던 시절, 긴 골목을 이북 피란민들이 시장을 만들어 가고 있었는데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갖가지 생활용품들과 군용물품들이 주로 거래되었다. 아직도 군데군데 공터가 많아 여기가 약장수의 선전장이었다.

이곳의 약장수들은 서양식으로 장사를 했다. 칠성시장과는 달리 무대가 없고 출연진도 한 두 사람뿐이었다. 악기는 색소폰, 기타 그리고 손풍금이 주로 등장했는데 노래는 거의 우리 가요였지만 가끔은 유아 마이 션샤인, 다이아나, 싱싱싱 등 서양 노래도 연주가 되었다.

여자 가수를 데리고 다니는 패들은 봄날은 간다, 홍콩 아가씨,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나는 열일곱살이에요 등을 자주 불렀다. 남자는 가수가 따로 없고 연주자가 부르는데 선창, 나그네 설움, 울고 넘는 박달재, 신라의 달밤, 서울 가는 십이 열차, 고향만리, 베사메무초 등 주로 남인수, 현인, 백년설의 노래를 불렀다.

시장이 아닌 곳에서도 약장수가 있었다. 시청 앞이나 달성공원, 동인동 뚝방 아래서 약을 팔았는데 이런 데서는 음악이 없었다. 원숭이를 한 마리 데리고 다니며 장대 넘기를 시키거나 산 뱀을 목에 걸고 몸 위를 기어 다니게 했다. 가끔은 차력사가 가슴에 감은 굵은 철사 줄을 끊거나 가라테로 벽돌을 깨면서 호객행위를 하였다.

집에서 술을 담그는 행위, 산에서 나무 하기, 길거리에서 가짜 약팔기는 당시에도 불법이었다. 약 팔던 악사, 가수도 천시 받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밀주는 가양주로 빛을 보고 약장수의 떠돌이 가수도 선생 소리를 듣고 인간문화재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석가모니가 일찍이 말씀하셨다. 인생무상이라고. 세상살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 무슨 일이든 끝까지 하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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