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마라톤의 추억

입력 2018-04-14 00:05:04

지난 4월 1일 2018 대구국제마라톤대회 TV 중계방송을 시청했다. 봄을 맞이한 대구의 아름다운 풍경이 화면 가득히 펼쳐져서 반가웠다. 힘차게 달리는 선수들 모습 뒤로 도심 곳곳의 대형빌딩과 상업시설이 선명하게 보였다. 도시 브랜드 홍보 효과가 클 것 같다. 최근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마라톤 감독의 사인이 담긴 A4 용지를 얻었다. 대구마라톤 결승선 인근 호텔의 입점 업체 벽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시원스러운 필체의 사인과 함께 적힌 42.195라는 숫자를 바라보면서 문득 보스턴 마라톤대회의 기억이 떠올랐다.

2001년 4월 어느 봄날이었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을 기념하는 '패트리어트 데이' 휴일이었지만 연구실로 출근했다.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이봉주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미국인 행정 직원이 전화로 알려줬다. 세계 4대 마라톤대회의 하나인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1947년 서윤복, 1950년 함기용에 이어 51년 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직접 마라톤대회를 참관하지 못했지만 보스턴에서 생활하고 있던 내게 큰 자부심을 안겨줬다.

2014년 1월 오랜만에 보스턴을 방문했다. 보스턴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일본 나리타공항을 경유해서 갔다. 하버드 의대 주최로 이틀 동안 진행된 학교 정신건강에 대한 학술세미나에 참석했다. 둘째 날 오후에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테러 사건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보스턴 마라톤 테러는 체첸계 이슬람 극단주의자였던 차르나예프 형제가 압력솥을 이용한 사제폭탄을 터뜨려 3명이 사망하고 260여 명이 끔찍한 부상을 당한 사건이다.

테러범 조하르 차르나예프가 다녔던 케임브리지 린지 앤 라틴스쿨 교장과 학교 전담 경찰, 교육청 관계자가 나와서 발표를 했다. 토론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발언하기 위해 마이크 뒤로 길게 줄을 섰다. 질의응답 시간은 당초 예정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넘겨 마무리됐다. 세미나 참석자들의 사건에 대한 관심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대구국제마라톤대회 중계를 보면서 보스턴 마라톤 테러의 전모가 궁금해졌다. 작년에 개봉한 '패트리어트 데이'라는 영화 DVD를 구해서 감상했다. 2013년 4월 15일 117회 보스턴 마라톤대회 결승선 인근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가 무척 흥미진진해서 한 번에 다 봤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나온 '보스턴 스트롱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는 보고서를 PDF 파일로 구해서 읽었다. 테러가 발생한 지 총 102시간 53분 만에 테러 용의자가 체포되면서 위기 상황이 종결되기까지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보고서다. 박진감 넘치는 영화 스토리가 실제 사건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폭탄 테러로 다리가 절단되는 등 중상자들이 많았는데도 병원에 도착해 치료를 받은 부상자들은 모두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했다. 의학 데이터베이스인 펍메드(PubMed)에서 보스턴 마라톤 테러 관련 논문을 검색해봤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보스턴의 여러 병원에서 관련 논문이 발표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GH) 정신과의 캐서린 고 박사가 참여해서 마라톤 테러와 정신건강을 주제로 2016년 '란셋 정신의학지'에 발표한 논문이 특히 인상 깊었다. 캐서린 고 박사는 고경주(하워드 고) 전 미국 보건복지부 차관보의 딸이다.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서 '보스턴은 강하다'(Boston Strong)라는 슬로건이 실감 났다. 올해 보스턴 마라톤대회는 다음 주 월요일에 열린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보스턴 마라톤에 여러 차례 참가했다고 한다. 기회가 되면 나도 보스턴 마라톤대회 현장에 달려가고 싶다. 대구국제마라톤대회를 통해 훌륭한 유망주가 발굴되어 보스턴에서 한국 선수가 우승하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성승모 정신건강의학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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