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옳은 것을 실천하고 있나?

입력 2017-11-29 00:05:04

기자 생활을 좀 하다 보니 부자를 여럿 알게 됐다. 이들 중에는 수백억원의 현금을 동원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사람도 있다.

직간접적인 교류로 나름 알짜배기 부자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진짜 부자는 잘 티가 나지 않는다. 먹고 입는 게 검소해 부자로 보이지 않는다. 은둔하지는 않지만, 사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는다. 자수성가한 사람일수록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한다. 또한 푼돈은 내도 큰돈은 쓰지 않는다. 조금 가깝다고 생각하면 은연중에 돈 자랑을 하지만 돈 들 일이 생기면 금세 피한다.

부자가 된 경제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무엇일까. 돈의 사회 환원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돈을 번만큼 일정 부분을 사회에 돌려준다는 개념이다. 말은 쉽지만 이를 실천하는 부자는 많지 않다. 자신과 가족 등에겐 관대하지만, 사회에 베푸는 것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대구'경북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로부터 면전에서 들은 "애국하고 바르게 살면 돈 못 번다"는 말은 쉬이 잊지 못할 것 같다.

웬 부자 타령이냐고. 안동 임청각. 아니 임청각의 주인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의 '임청각 복원' 발언으로 전국적인 이슈가 됐지만 기자는 이전부터 석주 선생에 대해 꽤 관심을 뒀다. 일제강점기에 철로 건설로 훼손된 임청각이 원래대로 복원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보단 석주 선생이 왜 가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했으며 서간도 지역으로 갔는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99칸 대저택 임청각의 주인이었던 석주 선생은 나라가 무너지자 시대적인 책임감으로 저항에 나섰다. 초기 국내에서 계몽운동과 무장투쟁을 하다 한계에 부딪히자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했다. 무장투쟁으로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선 그는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이름을 남겼다.

석주 선생의 독립운동이 더 주목받는 건 1911년 54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임청각을 매개로 한 가족과 친척 50여 가구를 이끌고 집단 망명했다는 점이다. 임청각 출신의 망명자 중 9명이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다는 것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1932년 75세의 나이로 중국 땅에서 운명하면서 광복 달성 전에는 유골을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임청각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이달 6일 안동에서는 '임정 초대국무령 석주 이상룡선생기념관 건립 및 임청각 복원추진학술대회 및 토론회'가 사단법인 유교문화보존회 주최로 열렸다. 경상북도와 안동시가 후원하면서 행사는 성대했고 진지함이 넘쳐 흘렀다.

이날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인사말을 통해 "임청각뿐만 아니라 석주 선생의 정신을 복원하자"고 했다. 김 지사는 "역사적 사실로 접근하면 석주 선생의 '조국'을 보는 눈에는 절실함과 애절함이 묻어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기자의 뇌리를 때린 건 도지사 임기 초에 스스로 이런 행사를 마련하지 못한 그의 탄식이었다. 왜 문 대통령이 일침을 가한 후에 이렇게 나서야 하는지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비쳤다. 어쩌면 문재인 정권은 보수 정권의 터전에 있는 임청각 복원을 통해 이를 먼저 실행하지 못한 보수 정권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고 한 것이 아닐까.

토론회 발제를 한 김희곤 경상북도독립기념관장은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며 사신 사람이다"는 말로 석주 선생의 삶을 평가했다. 석주 선생은 자신과 가족, 문중보다 국가를 상위 개념으로 여기고 임청각 사람들과 함께 이를 실천했다.

개인적으로 백두산(장백산)이 포함된 중국 길림성 일대를 몇 차례 여행하면서 석주 선생의 망명지인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를 한 번 찾아가려고 했으나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유하현 인근 통화현'환인현'집안현이 백두산을 연계한 고구려 유적지 여행 상품으로 인기 있는 만큼 석주 선생의 항일민족운동 발자취를 짚어보는 프로그램도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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