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모를 것이다/정태규 지음/김덕기 그림/마음서재 펴냄
눈 깜박임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정태규 작가가 '안구 마우스' 장치를 이용해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생의 기록이다.
소설가이자 국어 교사였던 지은이는 2011년 어느 가을 아침, 평소와 다름 없이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와이셔츠에 왼팔을 꿰고 오른팔을 꿰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힘이 없었다. 오십견이 심해졌나? '이제는 나도 늙나 보다.' 속엣말을 중얼거리며 와이셔츠를 입었다. 그런데 단추를 채울 수 없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보, 단추가 안 끼워져."
그날부터 점점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가벼운 물건조차 들지 못하고, 길을 걷다가도 맥없이 푹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대체 내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원인을 찾아 여러 병원을 전전했고, 1년여 만에 루게릭병임을 알았다. 첫 증상이 나타난 뒤로 7년이 흘렀다.
루게릭병은 몸에서 근육이 점점 사라지고, 전신이 마비되며, 결국 호흡마비로 사망하는 병이다.
'신이시여, 왜 저란 말입니까.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씀입니까!'
갑자기 닥친 가혹한 불행 앞에 지은이는 신을 저주하며 혼돈과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낯선 삶의 질서를 받아들였다.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구술을 했고, 구술조차 힘든 상황에 이른 뒤로는 '안구 마우스'를 사용해 글을 썼다.
죽음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괜찮았다. 오히려 건강한 육신으로 살아가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생의 기쁨과 희망을 발견했다. 길게 늘어진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그는 생의 싱그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늘 속에서 바라보니 저 너머 밝은 곳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선명했다. 지은이는 '그늘'에 누워,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사소한 일상이 커다란 축복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간지러운 것도, 욱신욱신 쑤시는 것도 다 그대로인데 근육 세포만 쏙쏙 사라져 움직일 수 없는 병. 딱딱한 육체의 감옥에 갇힌 채 나를 나로부터 철저히 타자화 할 수밖에 없는 병.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이 루게릭병이라고 말한다. 부산대병원의 검사 결과가 정확하다면, 나는 그 루게릭병일 가능성이 높았다.' -30쪽-
날마다 조금씩 나빠지는 병. 절대 좋아지지 않는 병. 병세를 늦추는 것이 가장 최선인 병. 그것이 루게릭병의 정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병, 오직 죽음의 날을 기다리게 하는 병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단지 이전과는 다른 질서 속에서 살게 될 뿐이다. 이전처럼 아침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일은 없겠지만, 내 손으로 옷을 입고 밥을 떠먹는 삶은 아니지만, 새로운 질서 속에서 내 삶은 계속될 것이다. 그 삶은 근육을 움직여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노루귀, 괭이눈, 복수초…. 근육 없는 꽃들의 삶을 어찌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는 일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아직은 죽은 게 아니다.'
지은이는 병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로 괴로워하기보다는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시도해보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말문이 막히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 많이 대화하고,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가족과 추억을 더 많이 만들자고 말이다. 세 번째 소설집도 내고, 지금까지 쓴 작가론과 평론을 모아 평론집도 내고….
그는 죽음에 저항하는 동시에 죽음을 긍정하고, 닥쳐오는 죽음과 보조를 맞추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갔다.
죽음이 지척에 도착했지만, 가족과 벗들은 떠나지 않았다. 위루관(환자의 위장에 관을 넣어 음식물을 주입할 수 있도록 만든 관)과 호흡기 사이에 아내가 있고, 매트리스와 굳은 몸 사이에 수시로 자세를 바꿔주는 두 아들이 있다. 안구 마우스와 아직 깜빡일 수 있는 눈 사이에 후배들과 동료 문인들이 있다.
지은이는 '호흡기에서 들려오는 서걱서걱 거친 숨소리와 안방 창으로 가득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조화를 이루어 묘하게도 평화롭다. 이 방에 정적이 흐른다면 아마도 내 호흡기가 작동을 멈추었을 때일 것이다. 언제고 저 호흡기만 떼면 난 생을 달리할 수 있다. 이토록 가까운 죽음 곁에서, 나는 매일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한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분노
지은이는 두 눈을 깜박이는 것 말고는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아직 깜박일 수 있는 두 눈으로 생의 기쁨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두려운 것은 죽음에 대해, 육체의 감옥에 갇혀 눈만 깜박일 수밖에 없는 이 불행에 대해 분노나 공포의 감정에 사로잡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이해인 수녀(시인)는 "고통 중에도 타인을 배려하는 노력과 유머를 잃지 않는 그의 시적인 문장들은 너무 아름답고 따뜻해서 오히려 슬프다. 살아 있는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며, 당연히 누리는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자주 잊고 사는 우리에게 그의 글들은 다시 일어설 용기와 감사 그리고 희망을 심어준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예의, 삶에 대한 외경과 겸손을 체험적 고백으로 깨우쳐준다. 그의 간절한 눈빛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고 말한다.
▷지은이 정태규는
지은이 정태규는 1958년생으로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제1회 부산소설문학상과 제28회 향파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부산작가회의 회장과 부산소설가협회 회장을 지냈다. 소설집으로 '청학에서 세석까지' '길 위에서' '편지'가 있으며, 산문집 '꿈을 굽다', 평론집 '시간의 향기' 등을 냈다.
▷그린이 김덕기는
그린이 김덕기는 1969년생으로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독특한 화풍으로 한국 화단에서 '색의 마술사'라는 평가를 받으며, 지금까지 3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밝고 경쾌한 색채로 가족의 소박한 일상을 그려 '행복을 전하는 화가'로 주목받고 있다.
276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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