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일국경조약체제'를 복원하자

입력 2017-10-25 00:05:01

25일 독도의 날을 맞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1693년 일본의 안용복 납치 사건으로 촉발된 한일 간의 독도 영유권 논쟁은 30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한일 양국이 서로 다른 잣대와 재료를 통해 이 문제를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통의 접점을 찾으면 논의는 보다 단순해진다.

한일 독도 영유권'국경 논쟁은 1693~ 1699년 전개된 울릉도쟁계(爭界), 1877년 태정관지령(太政官指令),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금까지 이 네 개의 사건은 개별적으로 분리된 형태로 분석되었으나, 연속적인 시각에서 통합적으로 검토되어야 마땅하다.

1693년 일본 막부(정부)의 허가를 받아 울릉도에서 어업을 하던 일본인들이 안용복을 납치했다. 그해 12월 일본은 안용복을 송환하면서 일본 땅 울릉도에 조선인의 출입을 금지하라는 요구를 한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은 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국경교섭을 전개한다. 1699년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는 한국 땅이므로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渡海)를 금지한다는 서계(외교문서)를 보내고 조선정부도 승인했다. 이 합의(국경조약)로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은 확보되었다.

이 사실은 일본의 메이지(明治) 정부에서도 기본 방침으로 확인된다. 근대적인 내각제도가 성립되기 전, 일본의 최고 통치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은 위의 국경조약을 승계하여 1877년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 땅이 아님을 명시할 것'이라는 지령(指令)을 내렸다. 태정관지령은 1699년 국경조약을 실현하기 위한 일본의 국내적 조처였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1699년 국경조약, 일본 국내적으로는 태정관지령을 통해 한일 간의 국경조약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당시는 홋카이도와 오키나와 등을 병합하면서 근대 일본이 팽창적으로 국경을 획정하던 시기였다.

1699년 이후 200년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국경조약체제는 1905년 일본이 각의 결정과 시마네현 고시(告示)를 통해 독도를 일방적으로 편입하면서 붕괴되었다. 문제는 각의 결정이나 현 고시를 통해 조약을 근간으로 한일 간의 국경체제를 파기할 수 있는가이다. 조약은 파기할 수 있으나 반드시 상대국에 대한 통고 의무가 따른다. 일본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일본 국내법 체계에서도 일종의 행정조치(명령)에 지나지 않는 각의 결정과 현 고시로 법률에 상당하는 효력을 가진 태정관지령을 폐기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일본의 독도 편입은 상위법 위반으로 원천 무효에 해당한다.

1951년 미국 등 연합국은 국제법적으로 일본과 전쟁을 끝내고 식민지 지배를 종결하는 샌프란시스코조약을 체결한다. 조약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규정했다. 독도에 대한 언급이 없어 조약 해석에 따라 독도 영유권이 결정되게 되었다. 일본은 조약에 독도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해석하고, 미국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이 이처럼 주장하는 데에는 미국이 잘못된 정보에 근거하여 판단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은 1905년 이전의 한일국경조약체제의 존재를 모르고 일본의 독도 편입을 정당한 것으로 평가해 독도를 누락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조약 해석의 근거가 되는 미국의 판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조약의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

결론은 1699년 이후 확립된 한일국경조약체제의 역사성을 복원하고 이론화하면 독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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