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신 탈북인 소원 "그리운 가족 품으로…"

입력 2017-09-30 00:05:00

탈북인 김련희 씨가 대구시 중구 계산성당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자신의 북송을 돕는 사람들이 있어서 한국 생활 초기보다는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고 했다.
탈북인 김련희 씨가 대구시 중구 계산성당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자신의 북송을 돕는 사람들이 있어서 한국 생활 초기보다는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고 했다.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김련희 지음/ 도서출판 615 펴냄

평양 출신 탈북인 김련희 씨가 책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를 펴냈다. 책 제목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에서 보듯, 김련희 씨는 대구에 살고 있지만, 자신을 평양시민이라고 칭한다. 어떤 사정으로 대구에 살고 있지만 자신은 평양시민이며, 한국행이 '자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조선족 브로커에 속아 남한에 왔다"며 "꼭 돌아갈 것이다. 나의 어머니 조국에.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라고 말한다. 김련희 씨는 2011년 9월 한국에 왔다.

◆친절한 조선족 브로커에 속아 한국행

돼지고기 전골을 먹고 난 뒤 육중독(보툴리누스중독)에 걸렸다. 김책공업종합대학 병원에서 일주일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몸은 천근처럼 무거웠고,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저녁에 퇴근할 무렵이면 손과 다리가 부어 신발을 신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진단 결과, 전신 간복수였다.

간복수로 입원한 지 6개월쯤 지났고, 어느 정도 진정 기미를 보일 무렵 중국에 있는 사촌을 방문하게 되었다. 기차로 평양역을 출발해 중국 단둥에 도착했다. 중국 땅은 넓어 입국한 당일 바로 목적지로 출발하는 경우가 드물다. 일단 여관에 짐을 푼 뒤 사촌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은 사람은 사촌 언니가 아니었다.

북한에서는 국제통신사를 통해서만 국제전화가 가능하고, 해외에 연락할 때는 대체로 편지를 하는데, 중국과 조선 간 편지 연락은 보통 20일~한 달이 걸렸다. 북한에서 중국에 있는 사촌 언니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했는데, 그 사이에 언니의 핸드폰 번호가 바뀌었던 것이다.

언니에게 연락할 방법을 몰라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는데, 한 남자가 조선말로 '속상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사촌 언니의 바뀐 전화번호를 찾아내 알려주었다.

◆두세 달 돈 벌어 돌아갈 수 있다고 믿어

사촌 언니 집에서 한 달을 즐겁게 지냈다. 어느 날 감기 증세가 있어 병원에 갔더니 다시 간복수였다. 소변도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평양으로 돌아가자니, 매일 병상에 누워 앓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볼 부모님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중국에서 돈을 벌어 병을 말끔히 치료하고 돌아갈 결심을 했다.

사촌 언니에게는 평양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선양으로 가서 한달에 1천300위안을 받고 식당에서 일했다. 그러나 그렇게 벌어서는 어느 세월에 간복수를 치료할까 막막했다. 일하다가 간복수로 쓰러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컸다. 좀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은 없을까? 사촌 언니에게는 평양으로 간다고 말했던 터라 다시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그때 마침 단둥에서 친절하게 자신을 도와주었던 조선족 남자가 생각났다. 그에게 전화를 냈다.

"바보냐? 한국에 두 달만 갔다 오면 몇 배는 번다."

한국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김련희 씨가) 실정을 너무 모른다며, 중국 사람들도 여기서 돈 벌기 어려워 한국에 간다고 말했다. 자기 옆집 사람도 두 달 동안 한국에 가서 많은 돈을 벌어왔다고 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조선 북쪽과 중국 국경 마을 사이에 하루에도 몇 번씩 식량을 구입하러 다니고, 밀수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배로 중국과 한국을 조용히 오가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착각했다.

그렇게 믿고 여권을 그 남자에게 넘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나온 북한 사람들을 한국으로 유인하는 전문 브로커였다. 그는 한국에 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한국은 북-중 국경처럼 몰래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각종 조사를 받고, 한국 사회 적응교육도 받았다. 두세 달이면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밀항'여권 위조'자살'간첩 행세까지

대부분의 탈북인들은 한국에 입국한 후 신분 조사와 한국 사회 적응교육을 받고 일정한 정착금을 지원받는다. 그리고 보통 6개월~1년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고, 해외 여행도 가능하다. 김련희 씨는 자신도 그렇게 여권을 받고 중국으로 가서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권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탈북인들은 다 받는 여권을 자신은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국가정보원에 문의했다. "처음부터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기에 '신원 특이자'로 분류돼 여권을 발급할 수 없다"는 답이 왔다.

평양으로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밀항을 시도했고, 위조 여권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김련희 씨를 속였고, 분노한 그녀는 위조 여권을 제공하겠다는 사람을 신고했고, 그녀 역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밀항과 위조 여권에 실패한 그녀는 낙담해 자살을 시도했다. 수면제를 대량으로 삼켰으나 병원 응급실에서 깨어났고, 손목 혈관을 끊고 피를 철철 흘렸으나 이튿날 지인에게 발견돼 자살에 실패했다.

최후의 선택은 스스로 간첩이 되는 길이었다. 간첩으로 분류되면 일정 기간 감옥살이를 하고 북으로 강제 추방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기대를 했던 것이다. 간첩이 되기 위해 그녀는 탈북인 17명의 정보를 수집해 휴대폰에 저장하고, 경찰에 스스로 신고했다. 2014년 6월 2일이었다. 그렇게 대구구치소에 수감됐고, 9개월간의 수감 생활과 두 번의 재판 끝에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으로 출소했다. 강제 추방의 꿈마저 좌절됐다.

◆고급 가구 갖춰진 아파트에서 생활

김련희 씨는 196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북에 있을 때 김책공업종합대학 양복점 소속 양복사였고, 남편은 군의관이었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투쟁하다가 1941년 일제에 잡혀 희생됐다. 아버지는 대동강 텔레비전 수상기 공장 부문 당비서였고, 어머니는 평양시 동대원구역 병원 의사였다. 시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당한 일류 영예군인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중어 교원으로 일했다.

어린 시절에는 본채(방 2칸과 부엌)와 사랑채, 60평 정도의 텃밭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았다.

그녀가 만 16세 되던 해인 1985년 국가로부터 현대식 새 아파트를 배정받아 이사했다. 20층짜리 아파트의 14층이었으며, 거실과 방 3칸, 부엌, 위생실, 창고가 갖추어져 있고, 입주했을 때 방마다 고급 가구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책에 "북에서는 돈 한 푼 내지 않고 국가로부터 살림에 필요한 고급 가구들이 들어 있는 새집을 배정받는다. 단지 전기, 수도, 난방비를 조금만 내면 되는 것이다. 우리 아파트 정면에서는 평양 고려호텔과 윤이상 음악당이 있고, 왼쪽에는 평양역, 김책공업종합대학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평양대극장이 바라보이고, 뒤쪽에는 대동강이 흘렀다"고 쓰고 있다.

◆"제도 미비하다면 인도적 송환해야"

김련희 씨의 북한 송환을 돕는 장경욱 변호사는 "국가정보원은 김련희 씨의 북송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그녀의 북송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분단체제상 법에 따른 제도의 미비를 이유로 북송을 거부하며 가족 간 생이별을 강요하는 것이다. 제도가 미비하다면 정부 당국은 김련희 씨의 인도적 송환에 앞장서야 한다. 선례도 있다. 1993년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씨를 비롯해 2000년 9월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북송했다. 또 바다에서 표류하던 북한 어부들이 북으로 되돌아간 사례는 부지기수다. 정부 당국은 김련희 씨 북송을 위한 제반 인도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련희 씨는 이렇게 말한다.

"남쪽 사람들은 그런다. 가난하고 배 곪는 북쪽에 왜 가고 싶냐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여기서 살고 싶지 않냐고. 그러나 나는 단연코 이야기하고 싶다. 북에서의 생활이 남쪽보다 더 풍요롭지 않더라도, 비록 풀죽을 먹더라도 가족과 함께 부대끼며 살고 싶다." 그녀가 북으로 돌아가야 할, 이보다 더 분명한 이유가 있을까.

이 책은 김련희 씨가 한국으로 오게 된 과정을 비롯해, 그녀의 어린 시절, 일, 결혼과 출산, 고난의 행군 시절 등을 담고 있다. 부록 '김련희에게 묻다'는 한국의 대학생들이 북한 생활에 대해 묻고, 김 씨가 답하는 형식의 대담이다. 303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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