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1>-엄창석

입력 2017-09-04 16:06:26

제14장

길게 뻗은 레일이 아침 햇살을 게으르게 반사하고 있었다. 높이 솟은 첨성대 모양의 급수탑에서는 허연 증기가 평화롭게 피어올랐다. 평지에 가로 놓인 두 가닥 레일이 초량에서 만주까지 이어져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병사들과 무기를 태우고 러시아 전쟁터로 질주할 때만 해도 기차는 거대한 독사(毒蛇) 같았다. 언제 어디서 한인들이 공격해올지 몰라 칸마다 초병들을 세웠고, 독을 뿜듯이 증기를 푸우푸우 토하며 산야를 달렸다. 이제는 병사들이 사라지고 객차에는 성장(盛裝)한 귀부인과 신사들과 유람객들이 앉아서 한가롭게 신문을 뒤적였다.

이런 와중에도 대구는 그렇지 않았다. 1907년 4월. 도시 가운데 있는 성의 안과 밖은 격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정거장 건너편으로 펼쳐지는 넓은 담배 밭은, 초봄에 밭두렁을 태운 뒤로 파종을 하지 않은 채 버려두고 있었고, 향교 너머의 담배 밭에는 흙은 고르고 파종을 하느라 일꾼들이 떼로 모여 있었다. 며칠 사이에 도시의 풍경은 쪼개진 상태였다.

"하필 이런 때에 떠나는 군."

기차를 기다리다가 장상만이 말했다. 계승도 가방을 품에 안으며 역사(驛舍) 쪽을 돌아보았다. 역사의 낮은 지붕 위로 먼지가 옅은 안개처럼 번졌다.

사흘 전, 박중양은 남은 성곽을 헐기 위해 주민에게 부역령을 내렸다. 지난 늦가을에는 부산에서 인부를 데려와 야밤에 몰래 성곽을 헐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성 안팎에 포고문을 붙였다. 성이 위험에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면서 조정의 명령까지 떨어졌다고 했다. 성을 본격적으로 허물기 하루 전, 그러니까 그저께 마욱진의 지게부대가 나서서 서쪽 성벽 철거작업을 시작했다. 철거 부역령에 갈등하던 사람들이, 마욱진의 부대가 앞장서 작업을 시작하자 철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성을 철거해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해. 붕괴 위험 때문이란 거야. 반면에 성을 철거하고 나면 일인 상인들이 대구를 먹어치울 게 뻔하지. 하지만 그건 하나의 가정일 뿐이고, 심정적인 거잖아."

"왜 지금 성이나 헐자고 하는지 모르겠어. 국채 보상으로 도시가 뜨거워져 있는데 말이야."

"박중양은 뱀처럼 교활해. 가는 곳마다 이토 히로부미처럼 국채보상을 하는 한국민들이 갸륵하다고 떠벌리면서 성은 위험하니까 철거해야 한대. 뭔가 정신적인 것을 노리고 있어. 성 자체가 왜침(倭侵)을 막았던 수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거든. 도시민들 가슴 속에 담긴 그 기억을 제거하겠단 거지......"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얘기였다.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수천 명의 의병을 제압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뜻이다. 저항과 압제, 음모와 살육이 횡행하고 있지만 시골의 농민들과 도시의 상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공기의 흐름이었다. 정신적인 투쟁이란 면에서 서석림도 이를 놓치지 않았다. 석달만 담배를 끊으면 국채를 갚을 수 있다는 충정의 뒷면에는 보부상 출신의 예지가 담겨 있는 게 아니던가. 석달만 끊으면 사람들이 담배 맛을 잃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인 상인들이 절반쯤 몰락할 터였다. 이 무렵 대구는 일인들이 경작하는 담배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배 밭은 무려 70정보나 되었다. "국채를 다 갚는 날에는 모든 백성이 모여서 축하 담배를 피우자"는 어느 신문의 지지 논평은, 그러니까 금연 보상의 깊은 뜻을 모르고 나온 말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계승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갈색 가죽 가방을 손에 들고 있지만 황제에게 보여줄 국채 보상 취지문은 상의 속에 숨겨두었다. 상의 등판에 바느질을 하여 거기에 석재가 쓴 취지문을 넣은 것은 서석림의 의견이었다. "가방을 수색 당할지 몰라. 취지문을 목숨보다 귀히 여겨야 하네. 폐하의 각별한 뜻이 계실 거네."

계승은 서울에 가본 적이 없었다. 정말 아무 일 없이 궁궐에 이를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황제의 권력보다 일본 통감부가 더 윗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게 지금의 상황이 아닌가. "장상만과 같이 가겠습니다. 그는 총을 잘 다룹니다. 무슨 변고가 닥치면 그가 저를 엄호할 것입니다." 서석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매일신보를 찾아가게. 전동에 있네. 서울정거장에서 전차를 타면 될 거야. 신문사에 들러 총무 양기탁을 만나서 은밀히 이용익 대감을 뵐 수 있느냐고 물으면 되네."

가슴이 벅차올랐다. 양기탁이 누구인가. 베델이라는 영국인이 설립한 대한매일신보를 실제로 운영하는 이가 양기탁이었다.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대한매일신보에서 연일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지지 논설을 띄워 이 운동이 전국으로 퍼지게 된 것이다.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양기탁과 신채호의 글을 애독했었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유명한 논설로 정간을 당한 후, 대한매일신보가 저항 언론을 대표했는데 그 핵심적인 인물이 양기탁이었다. 매일신보의 대구 지사가 광문사이니까 계승은 매일 그 신문을 볼 수 있었다.

기차가 괴성을 지르며 다가왔다. 기차 기관실에서 허연 증기가 펑펑 쏟아졌다. 일곱 냥의 기차는 거대한 몸체를 지네처럼 철컹철컹 순차적으로 멈추며 주변을 압도했다. 계승과 장상만은 세 번째 객차에 올랐다. 객차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표를 보고 좌석을 찾아 앉으면서 계승은 누가 한인인지 일인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지난해만 해도 옷차림과 머리 모양만으로 쉽게 알아차렸다. 이즘엔 한인들도 짧은 머리를 하고 프로코트를 입는 이들이 늘어났다. 한인들이 따라 프로코트를 입으니까 일인들은 되레 기모노나 하오리를 걸치는 쪽이 많아졌다. 아니면 화려하게 양장을 하고 달팽이 같은 모자를 쓰거나.

돌아올 수 있을까. 이 길이 마지막이 아닐까.

계승은 옷에 감춘 취지문을 의식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죽어도 괜찮아! 그렇게 작심하고 떠나는 길이지만 애란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서 다시 돌아오고 싶었다. 애란과 살려고 얻어놓은 집을 나흘 동안 수리하고 청소를 했다. 헐어진 벽에 흙을 다져넣고 깨진 부엌 축담에는 힘들게 시멘트까지 구입해서 발랐다.

연금 수납 등을 마치고 오다 보니 수리를 할 때는 대개 저녁 이후였다. 사방에 호롱을 피워서 일을 하는 데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보다 어두운 가운데서 호롱의 불빛 속으로 걸어다니는 그녀의 몸이 말할 수 없이 뜨거웠다. 계승은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문밖 어둠 속에서 그녀가 불쑥 나타났고, 불빛에 드러난 얼굴이 영롱했고, 치마 속으로 불빛이 너울너울 들어가 엉덩이의 윤곽을 사뭇 그려냈다. 흙이 묻은 그녀의 흰 팔과 뺨, 그에게 다가와 속삭이던 흰 치아와 입 냄새, 부드러운 손바닥, 젖은 듯한 눈, 일을 끝낸 뒤 방과 부엌에서 나누었던 몇 차례의 사랑.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냥 폐하께 취지문을 전해주고 오는 거지. 이런 것을 우편으로 부칠 수는 없잖아.

장상만은 옆에서 팔짱을 끼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위험할지 몰랐다. 대화를 엿듣던 옆 사람들이 어떤 낌새를 느낄지 알 수 없었다. 황간을 지나면서 주먹밥을 나눠 먹을 때도 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신문사까지는 장상만과 동행하지만 아마 입궐은 혼자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신문사에서 만날 양기탁의 의견을 따를 예정이었다.

기차는 40여 킬로미터마다 정지했다. 역에서 승객을 태우기도 했지만 증기기관을 돌릴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높은 급수탑에 옆에 멈춘 기차는 긴 수관을 걸치고 오랫동안 대기했다. 기차가 멈춰 있으면 몹시 불안했다. 의병들이 기차에다 대고 총질을 할지 몰랐다. 느닷없이 군인들이 들어와 수색을 할는지도. 굳이 그와 장상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해도, 쫓기는 의병이 기차에 타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까지 가는 동안 기차는 스무 번쯤 멈췄다. 의주까지 간다면 간이 콩알만 해질 것 같았다. 서울에 도착할 즈음엔 차라리 무덤덤해졌다.

다섯시가 조금 지나 서울정거장에 진입했다. 역사는 규모만 클 뿐 대구정거장이나 다를 게 없이 짧은 기둥 위에 얇은 함석지붕이 얹혀 있었다. 아주 볼품없는 역사지만 사람들은 정말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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