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책이란 놈. 고놈 참 대단하다.

입력 2017-07-24 00:05:04

"어머니 학교에 가기 싫어요. 안 가면 안 될까요? 아이들이 저를 왕따시키는 것 같아요."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얼굴만 보던 어머니는 한참 후에 힘겹게 말했다.

"얘야 그래도 가야 하지 않겠니. 네가 선생인데."

몇 년 전부터 교사들 사이에 회자하던 농담 같은 진담이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기 싫은 만큼 교사들도 학교에 가기가 싫은 모양이다.

새 학교로 이동했다. 벌써 몇 번째 이동인데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언제나 힘겨운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생들도 힘겨웠다. 부모의 돌봄은커녕 아이들이 부모를 돌봐야 하는 때도 있었으며, 교사들이 부모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아이들인지라 선생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잠깐이고 수업 시간 내내 잠을 자거나 야단치는 선생님께 대들기 일쑤였다. 정말 학교에 가기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 선생님 한 분이 생뚱맞은 제안을 했다.

"심심한데 애들 안 읽는 책 우리나 읽읍시다."

그랬다. 도서관에는 보기만 해도 매력적인 신간 도서가 참으로 많았지만, '땡'하면 다들 학교를 떠나기에 바빠 도서관은 늘 한산했다. 그 한산한 공간에 심심한 교사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이기 시작했다.

한 달에 두 번 우리는 도서관에 모여 함께 책을 읽고 수다를 떨었다. 언젠가 한번은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선생님 한 분이 우연히 극장에 걸린 '안나 카레리나' 간판을 보시고는 얼른 읽고 영화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다들 '안나 카레리나'가 상당히 긴 작품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영화를 보러 갈 욕심에 멀고도 먼 여정에 동참했다. 그런데 100쪽을 넘게 읽어도 주인공 '안나'는 등장하지 않았다. 결국, 독서모임을 하루 앞두고 역시나 우연히 딸의 동화책 전집 목록에서 '소년 소녀를 위한 안나 카레리나'를 발견한 한 선생님 덕분에 우리 대부분은 소년 소녀가 되어 '명작 안나 카레리나'를 읽고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이렇듯 우리들의 독서모임은 여러모로 허술했다. 그러나 묘한 매력으로 나날이 회원 수를 불렸으며, 급기야 교감 선생님과 행정실에 근무하시는 선생님까지 동참하게 되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아마도 그 답은 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안나 카레리나'를 읽든 '논어'를 읽든 그 무엇을 읽어도 종국에는 학교를 둘러싼 우리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프고 외롭고 힘든 삶의 이야기를 맨정신으로는 털어놓을 수 없었지만, '안나'와 '공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삶의 엉킨 실타래가 풀려 있었다. 또한, 섬처럼 존재하던 '나'와 '나'와 '나'가 책을 매개로 '우리'가 되어 서로 삶에 공감하고 서로 위로했다. 책이란 놈, 고놈 참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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