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권정생 10주기…그리운 선생님, 선생님들

입력 2017-05-25 00:05:02

지난 17일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10주기를 맞이했다. 당일 '권정생 동화나라'(안동시 일직면)에서 '권정생 귀천 10주기 추모의 정' 행사가 열렸다. 10년 전 5월 17일, 대구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그 눈부시던 생명의 불꽃이 천천히 식어가던 선생의 야윈 손을 붙잡고 울면서 그의 임종을 지켜보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단 말인가?

1980년 5월 어느 날, 우연히 내가 재학 중이던 계명대학교 대명동 도서관에서 낡은 동화책 한 권을 손에 집어들면서 권정생 선생과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됐다. 그 책의 말미에는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 가면 동화작가 권정생은 없고 권 집사만 있다'로 시작하는 해설이 있었는데, 일직면 조탑동은 내 고향 의성군 단촌면 세촌동과는 조그만 강 하나를 두고 있는 지척 간이었다.

20세 피 끓는 문학청년이었던 나는 내 고향 지척에 바로 동화작가가 살고 있었구나 하는 경이로움과 설렘에 곧바로 고향집에 내려가 낡은 3천리호 자전거를 타고 조탑동 교회 헛간에 살고 있던 권정생 선생을 만났다. 내가 처음 선생께 느낀 감정은 외람되게도 '연민'이었다. 그는 이미 매일신문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입선과 당선한 동화작가였으나 너무나 가난했고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권정생 선생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봉화의 전우익 선생, 한국 아동문학의 대부로 불리던 이오덕 선생, 농민사목의 강골 정호경'유강하 신부, 프랑스 출신의 두봉 주교, 왜관 분도수도원의 독일 출신 임 세바스찬 신부, 의성 가난한 산골교회의 김영원 장로, 김천의 포도 농사꾼 김성순 장로, 농민회 대표를 지낸 영덕의 권종대 선생, 현직 고교 교사 김상일 선생과 문화회관의 오일창 선생, 분도서점의 이종원 선생 등등 권정생 선생을 에워싼 인적 네트워크는 그야말로 화려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권정생, 전우익, 이오덕 세 분의 우정은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부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1984~1987년 초까지 안동공업고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이때 권정생 선생을 집중적으로 만났다. 그 이전이나 이후 대구에서 생활할 때도 한 달에 한두 번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가면 거의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다. 그때 듣고 겪은 일화를 졸저 '나의 스승 시대의 스승', 시집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에서 기록한 바 있다.

1980년대 초 안동문화회관에서 영화모임을 열었다. 왜관 분도수도원에서 임 세바스찬 신부가 낡은 외제 밴에 영사기와 필름을 싣고 와서 틀면 그것을 다 함께 보고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영화를 본 뒤에는 토론회를 열었고, 토론이 끝나면 밤 11시가 되고, 다시 왜관 분도수도원으로 돌아가는 밴의 뒷자리 영사기 틈에 권정생 선생과 내가 끼여 앉아 타고 조탑동과 단촌으로 돌아왔다.

어느 가을날 달밤에 길가의 코스모스가 눈부시게 아름답던 길을 달려 조탑동 선생의 오두막에 도착했다. 선생이 차에서 내려서도 곧장 방 안에 들어가지 않고 세바스찬 신부에게 좁은 방 안에 들어가 물이라도 한 대접 마시고 가라고 애걸하듯 간청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8세 때 결핵을 앓으면서부터 평생 혼자 그 작은 오두막에 살아온 선생의 짙은 외로움은 그 가을밤이 아마 절정이었을 것이다. 10년 전 선생도 왔던 곳으로 가시고, 전우익, 이오덕 선생도 가시고 임 세바스찬 신부도 독일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누구나 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인생이고, 인생의 그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기록하는 게 문학이고, 권정생의 삶과 문학은 가난과 외로움과 슬픔의 결정체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 그리운 선생님,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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