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새論 새評] 보수의 희망

입력 2017-05-18 00:05:00

서울대(미학과 학사·석사) 졸업.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전 중앙대 겸임교수
서울대(미학과 학사·석사) 졸업.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전 중앙대 겸임교수

대통령 탄핵이라는 중대 사태에도

변화 시늉조차 안 한 '보수' 정치인들

처참한 대선 성적 받고 반성은 안 해

보수 가치 말할 수 있을 때 희망 있어

"보수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렇게 물으면 다들 '공동체의 가치' '가족의 중시' '전통의 존중'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정치학의 상식이다. 그렇다면, 내친김에 다시 물어보자. "그럼 대한민국에 이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는 보수가 있는가?" 이렇게 물으면 아마도 모두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이게 한국 보수의 현주소다. 대통령 탄핵 사태가 괜히 일어난 게 아니다.

그 병든 보수를 개혁하겠다고 바른정당을 만든 의원 중 13명이 자기들이 뽑은 후보를 버리고 당을 떠났다. 사유는 '후보가 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미니정당의 후보로는 다음 총선에서 재선이 어려우니 자기들이 병들었다고 진단했던 그 당으로 복귀한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그들이 떠난 후 외려 바른정당에는 후원금과 입당자가 쇄도했다.

대선 후보 토론에서 유승민 후보는 "따뜻한 공동체"를 말했다. 보수의 입으로 보수의 가치를 얘기하는 것을 솔직히 이번에 처음 듣는다. 그의 말대로 이번에 개혁을 못 하면 한국의 보수는 미래가 없다. 자유한국당은 특정지역의 민심만 장악하면 과거의 위세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나, 개혁을 거부하는 낡은 보수는 결국 민심의 바다 위에서 고립된 섬이 될 것이다.

과거에도 보수의 위기는 있었다. 가령 '차떼기'로 지지율이 바닥을 쳤을 때는 당사를 천막으로 옮기는 등 개혁의 시늉이라도 냈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으로 대선 전망이 어두워지자, 과감하게 '경제민주화'와 같은 진보의 이슈를 선점하고 심지어 당의 상징을 붉은색으로 바꿔가며 보수가 변화했음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중대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시늉조차 안 했다.

보수는 왜 변화하지 못하는가? 그동안 보수 정치인들은 '공포'와 '습관'으로 표를 얻어 왔다. 북한의 위협을 강조해 지지층을 '공포'로 몰아넣고 그들의 몸속에 자동적으로 자기들을 찍는 '습관'을 새겨놓은 것이다. 변화에 필요한 유연성을 허용하지 않다 보니, 지지층이 그 경직성으로 인해 정작 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들이 쳐 놓은 덫에 자기들이 걸린 셈이다.

'종북'과 '친북'이라는 마법의 주문만 외우면 지역에서 쉽게 당선이 되니, 그렇게 당선된 이들에게 전국적 경쟁력이 있을 리 없다. 결국 찍을 사람이 없다 보니 보수층이 졸지에 반기문'안희정'황교안'안철수를 거쳐 홍준표로 옮겨 다니는 정치적 유목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국의 자칭 '보수' 정치인 중에서 도대체 '종북' '친북' '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자기 얘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선에서 처참한 성적을 받아들고도 아직도 반성이 없다. 외려 몇 표 더 얻겠다고 국정 농단에 책임 있는 친박 핵심에 대한 징계까지 해제했다. 허울뿐인 인명진표 개혁마저 뒤로 되돌린 것이다. 그러는 사이 태극기집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둘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 바른정당을 '배신자'라 부르는 자유한국당을 다시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배신자'라 부르는 웃지 못할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어쩌다 보수가 이 모양이 되었을까?

한국의 보수가 되살아나려면 '보수의 가치'를 중심으로 거듭나야 한다. 공포와 습관이 아니라 보수의 이념과 가치를 말해야 한다. 희망이 없는 게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다. 유승민 후보에게 어느 젊은이가 쪽지를 건네더란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동안 창피해서 보수라고 말할 수 없었는데, 당신 덕분에 내가 보수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위기는 기회라 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젊은이들이 자진해 보수당에 입당하고 후원금을 내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던가? 이는 이준석'손수조 같은 '키즈'를 동원해 젊어진 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보수의 희망은 거기에 있다. 보수의 미래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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