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공원 설계 자부심…경북신도청·신라왕경·월드컵경기장·수성못가로 등 그의 손 거쳐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동곡리에 있는 김용수(72) 경북대 명예교수의 우촌정(又村亭)을 찾아가는 길은 설레었다. 우리나라 조경학의 선구자이면서, 지금도 서울시문화재위원회 위원장과 문화재청 신라왕경핵심유적복원정비사업추진단 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경북도청 신청사 및 신도시 조경 자문관으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촌 선생의 정원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려하고 웅장한 전원주택을 뒤로하고 우촌정에 들어섰을 때 느낌은 다소 의외였다. 그냥 소박하게 단장한 여느 산골 집과 다름이 없었던 탓이다. 아직 산골마을에 남아 있는 겨울의 흔적 때문에 더욱 삭막해 보이는 측면이 없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눈에 띄는 고가의 정원석이나 정원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니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잔재주를 싫어한다
"이곳저곳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하면서 고향이 그리워졌습니다. 퇴직 후에는 자연으로 돌아가야지 하면서 20년 동안 찾아다니며 좋은 땅을 물색한 끝에 1999년쯤 이 땅을 매입했습니다. 그토록 소중하게 얻은 만큼 원래 있던 돌 하나 나무 하나 훼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좋아하는 나무, 꽃들을 저마다 살기 좋은 적당한 곳에 심고 가꾸어 정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우촌정의 정원은 자연을 따른다. 3천500여 평에 130종의 나무와 꽃들이 있고 희귀종도 상당수 있지만 관리인이 없다. 그냥 주로 주말에 들리는 김 교수 부부가 유실수에 거름을 주는 정도가 전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순환에 따라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며 새들과 짐승(가끔 멧돼지와 노루들이 들림)이 찾는다. 특히 조경학과 대학원생들의 세미나 장소로 인기 만점이다.
김 교수는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연'노자 25장)을 이야기 했다. '인간은 땅의 법을 따르고, 땅은 하늘의 법을 따르고, 하늘은 도의 법을 따르고, 도는 자연의 법을 따른다'는 의미인데, 결국 "인간은 자연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인간의 힘으로 재주를 부려서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말라. 자연은 잔재주를 싫어한다"고 강조했다. 어쩌면 '다시 돌아가는 고향'이라는 의미의 우촌정은 김 교수의 조경철학이 실현된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꿈꾸는 낭만 청년, 그리스로 가다
1947년 경북 영천에서 출생한 김 교수는 영천국민학교(당시)를 나온 뒤 대구로 와 경상중과 대륜고를 졸업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외동아들에 대한 교육열은 남달랐던 것 같다.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원예학과에 입학할 때에도 가족들의 기대는 컸다. 당시 농과대학은 최고 인기를 누렸고, 특히 원예학과는 최첨단 미래학문이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대학 1학년부터 해외유학을 준비했다. 그 당시에는 '하늘에 별따기'라는 국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해야만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아산 현충사' 탓에 사단이 생겼다. 대학원 석사과정 때 아산 현충사 조성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광대한 논'밭에 멋진 현충사가 세워지고 수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것을 보고 "이게 내가 갈 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국내에 '조경'이란 말도 없던 때에 조경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김 교수가 국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한 것은 1972년이었다. 이제 어느 나라에서 무엇을 전공할지 선택이 남았다.
"중'고교 시절 그리스 신화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정부 초청을 받아 아테네대학으로 떠날 때, 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앞으로 뭘 먹고살려고? 제 정신인가'라면서요.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한다'라며 막무가내였습니다."
◆낭만과 현실, 인생의 쓴맛을 보다!
"아테네공항에 도착하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리스어를 한마디도 못하니 대학의 전공 건물 찾는데 이틀이 걸렸습니다.(당시 국비 유학생 시험은 영어만 치렀음. 이 때문에 김 교수는 그리스어를 한마디도 못하면서 그리스로 유학을 갔다.) 유학담당자가 구해준 숙소에서 밤새 공포에 떨며 울었습니다. 강의실에 앉아 있어도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고, 기본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귀국하고 싶어도 비행기 값이 없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김 교수는 그리스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랭귀지스쿨에서 그리스어 공부를 해야 했는데, 강의는 영어, 불어,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그리스어를 영어로 공부하는 상황은 불가피했다. 너무나 절망적이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 '언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교회였습니다. 교회(그리스정교)에서 아이들과 대화하면 좀 더 잘 그리스어를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주일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70드라크마를 주고 성서를 한 권 사 교회로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등교하는 데 그리스 친구들의 "안녕"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귀가 뚫리고 6개월이 지나자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그리스어 실력이 늘었다.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나 월 100달러의 장학금은 터무니없이 부족해 유학생활 내내 가죽 슬리퍼를 신고 속옷도 입지 않았다. 한국을 떠날 때 신었던 구두는 귀국할 때 신기 위해 아껴두었고, 속옷은 살 형편이 안 되었다.
이렇게 김 교수는 기원전 5~6세기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그리스 정원을 주제로 '아도니스 정원이 현대 그리스 정원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을 완성했다.
◆학문을 향한 열정, 우리 것이 최고!
김 교수는 그리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는 대신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스 신화시대 정원을 공부했다고. 그런 거 공부해서 뭘 먹고살겠노. 미국으로 가서 제대로 공부해라"는 가족의 성화 때문이었다.
"사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제 나이도 먹고 결혼도 해야 하는데, 이대로는 정말 막막했거든요. 미국은 근대 도시공원이 시작됐던 곳이라 보다 실용적인 공부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그리스에 비해 천국(?)이었다. 먹을 것이 풍부했고, 도서관에서는 전 세계의 모든 자료와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미 컴퓨터 등이 너무나 잘 갖추어져 있었다.
1975년 경북대 교수로 임용된 김 교수는 다시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교토대학에서 '일본 왕실 정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3년에는 역시 국비장학금을 받아 독일 도르트문트대학으로 가 스위스 줄리대학과 공동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사이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한'미 도시공원 비교연구'를 하는 기회도 가졌다.
"유학생활을 통해 유럽'일본'미국의 조경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각 지역마다 그 나름대로 식생과 기후, 문화가 있습니다. 선진국의 것이라고 무조건 모방해서 안 되는 이유입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이용객이 가장 많은 공원 중 하나인 두류공원을 설계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며 "국적불명의 공간 표현과 식생에 맞지 않는 수목을 없애고 우리 고유의 향토수종을 심어 소박한 우리의 자연을 도심에 표현해 볼수록 싫증 나지 않는 공간을 창출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경북도청 신도시 조성과 신라왕경복원사업과 관련해서도, 김 교수는 "조경은 나무와 꽃을 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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