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정의로운 범법자들

입력 2017-03-22 04:55:05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과정에 위법 혐의가 있다. 헌재는 국회의 소추장에 없는 사유(박 전 대통령의 검찰 및 특검조사 불응)를 들어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탄핵 이유 중 하나로 밝혔다. 재판을 맡은 헌재가 스스로 소추도 하고 심판도 했으니 소추권과 심판권 분리원칙에 어긋난다.

헌법 제12조 적법절차 규정은 '증거 없이 소추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국회법에 증거를 붙여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며, 이를 무시했다.

국회 소추안에 명시된 직권남용,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 강요, 권리행사 방해 등은 혐의일 뿐, 유죄로 확정된 것이 아니다. 이들 건에 관해서는 아직 재판조차 열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헌재는 이를 유죄로 보아 대통령을 파면했다.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 날짜에 맞춰 판결 일정을 정한 것은 소가 아니라 벼룩이나 빈대라도 웃을 일이다. 전 국민이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 탄핵 문제를, 재판관 퇴임 날짜에 맞춰 진행했으니 그 오만과 무지막지함이 하늘을 찌른다. 더 기막힌 것은, 스스로 정의롭고 지성적임을 자처하는 국민과 언론이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점이다. 죄지은 자를 처벌한다는 정의로운 임무를 수행하는 만큼, 그 과정의 위법이나 우악스러움은 문제가 아니라는 식이다.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절차에 비록 흠결이 있었더라도, 헌재가 결정을 내린 이상 달리 도리가 없다. 최종적 결정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 헌재는 탄핵이든 기각이든, 법률에 부합하는 객관적 근거를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헌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헌재의 이번 대통령 파면은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이다.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는 것과 그 과정의 법 위반을 지적하고 반성하는 것이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절차에 위법 논란이 있음에도 탄핵 찬반 여론의 우위를 근거로 '위법 혐의'에 대한 반성과 보완을 거부한다면 '법치'를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우리 국민은 '선택 가능한 여러 항 중에서 최악의 항'을 반복적으로 선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통령 탄핵 사태까지 오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분열과 분노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기어코 탄핵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은 조정자로서 역할을 철저하게 포기했다.

탄핵 결정이 난 뒤에도 마찬가지다. 박 전 대통령 진영과 태극기 측은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승복과 화합'을 선언해야 했지만 '불복'을 시사했고, 야권과 촛불 측은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신 '승리의 축제'를 열고 '승복하라'고 윽박질렀다. 지금도 곳곳에서 태극기와 촛불이 '탄핵 무효'와 '박근혜 구속'을 외치며 분노의 대결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김대중'노무현정부 시절 외교 안보 부처 고위직 출신들이 주축인 한반도 평화포럼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통일 외교 안보 관료들이 지금 즉시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그들은 '각 부처 공무원들도 더 이상 부역 행위를 저지르지 말기를 바란다'고 막말을 했다. 자기 직무를 수행 중인 '자국 공무원'을 상대로 부역 운운하는 세력이 집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게 이 나라의 현실이다.

한국인은 대체로 부지런하고 영리하다. 그보다 더 다행인 것은 최근 70여 년 한국은 대체로 '운이 좋았다'는 사실이다. 운 좋게 남의 힘으로 해방을 맞이했고, 참혹한 6'25전쟁을 겪었지만 불철주야 애를 쓴 선배 세대의 수고에 행운까지 더해져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다. 덕분에 우리는 민족 역사상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운이 좋을 것이라고 낙관할 근거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점괘가 될 것이다. 풍요와 영광이든 가난과 모멸이든 우리 선택이고, 우리 업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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