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1>-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입력 2017-03-07 04:55:01

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①

임지나

이마에 주름살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하긴 미국에서 산 세월이 벌써 40년 가까이 되었으니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다. 지금껏 걸어온 내 발자국을 돌아다본다. 아등바등 달려온 발자국들 위에 수많은 상처가 얼룩져 있다. 바로 저 상처들이 내가 걸어온 길이며 앞으로 계속 걸어가야 할 길일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미국 사람인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 때부터 그 길은 시작된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내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순간부터 예고된 길이었는지도 몰랐다. 세상에 누가 자신이 원하는 완전한 삶을 살고 생을 마치겠는가. 그렇지는 못해도 내가 여기 살았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진다면 성공한 삶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올라 조금은 위안을 받는다.

나한테는 위로 오빠 한 분과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내 인생이 빗나가기 시작한 것은 내가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여성을 차별하는 것 자체가 남성이 정한 법이요, 속박이었지만 우리 집에서는 그것을 따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나의 출생이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마음대로 한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딸로 태어난 것은 결론적으로 내 잘못이 되고 말았다. 집안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딸, 가문을 잇는 것도, 부모를 모시는 것도,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아닌 딸은 제아무리 똑똑해봤자 남의 집 좋은 일이나 시킨다는 것이 아버지의 견해였다.

그래선지 나는 남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구석에 동댕이쳐진 헌 빗자루처럼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다행히 남동생이 태어나자 한 묶음으로 호적에 올려져 쌍둥이가 되고 말았다. 동생이 일곱 살이 되자 아버지는 부리나케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지만 어영부영 학령(學齡)을 넘겨버린 나는 미운 오리 새끼처럼 또 한 번 버려졌다. 나이 많은 딸은 놔두고 아들만 학교를 보내자 어머니는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대들었지만 아버지의 결심을 바꾸지는 못 했다.

어머니는 속을 부글부글 끓이며 나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많지도 않은 딸 하나를 이렇게 천대하다니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악담을 해댔지만 경제권도 없고 주도권이 없는 어머니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도 내가 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왠지 내 잘못 같았다. 동생이 학교 간다고 쫄랑거리고 나가면 큰길까지 따라나가 그가 까마득히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나는 그때 내가 아버지의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자기 새끼를 품어주는데 아버지가 그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어딘가로 데리고 가셨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머니는 나를 천막학교로 데리고 가신 것 같았다. 열대여섯 명쯤 되는 학생들이 초라한 텐트 아래 앉아들 있었다. 말이 학생들이지 모두들 다 큰 처녀 총각들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천막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언니 오빠들은 내게 온갖 잔심부름을 시켰다. 학교에서는 그들의 심부름을 군말 없이 해주었지만 집에 와서는 어머니에게 그들의 흉을 있는 대로 보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런 것은 다 괜찮다고, 무조건 참고 견디라고,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몇 번이고 타일렀다. 어머니는 내가 절대로 자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공부에 걸신들린 사람처럼 강요를 하셨다.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바라는 단 한 가지는 나를 공부시켜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머니가 사는 목적이고, 성공한 삶의 전부라고 말씀하셨다.

천막학교는 비가 오면 난장판이었다. 정신없이 돗자리를 걷어들고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해야 했고 눈이 오면 꽁꽁 얼어서 그나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숨 막히는 더위와 모진 추위를 견디며 천막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천막학교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젊은 선생님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움의 길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막막한 교육의 길을 혈기 넘치는 젊음만으로 끌고 가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천막학교가 문을 닫자 가까스로 빛이 비치기 시작하던 내 배움의 샘터는 다시 말라붙었다. 나는 더 풀이 죽었고 우울한 몇 달이 그렇게 흘러갔다. 백방으로 알아본 어머니도 별다른 도리가 없어 한숨만 푹푹 쉬며 안절부절못하셨다.

그때 느닷없이 아버지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결정하셨다. 새 동네로 이사를 하고 동생은 전학을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동생이 전학 간 새 학교, 그 학교에 뜻밖에도 나 같은 아이들을 위한 공민학교가 있었다. 공민학교는 초등학교 뒤편의 허름한 목조 건물이었지만 비가 와도 돗자리를 걷을 필요가 없었고 눈이 와도 꽁꽁 얼어붙지 않았다. 책상까지 가지런히 갖춘 교실은 꿈에도 그리던 학교였다. 어머니가 이것을 놓칠 리 없었다. 내 손을 잡고 너는 하늘이 돕는 아이다. 바로 이 학교가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하고 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우리 반은 열두 살인 나를 선두로 열아홉 살까지의 처녀 총각들이 있었다. 동생과 함께 매일 학교를 가는 것이 꿈만 같았다. 언니 오빠들은 나를 꼬마라 부르며 예뻐하고 가끔 자기네들 연애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지만 모두들 동생처럼 대해주었다. 더구나 자상하고 다정하고 잘생긴 담임 선생님은 내 맘에 꼭 들었다. 집에 와서도 선생님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선생님도 사춘기를 타느라 늘 삐딱한 언니 오빠들보다는 총명하고 공부 잘하고 말도 잘 듣는 나를 훨씬 더 예뻐하는 것 같았다. 좋은 선생님 밑에서 언니 오빠들과 공부하는 매일매일이 소풍을 가는 것처럼 즐거웠다. 내 앞길에 활짝 꽃이 핀 것 같았다.

공민학교도 나무랄 데 없이 좋았지만 내 목표는 동생이 다니는 우뚝 솟은 이층 벽돌 건물, 초등학교로 가는 것이었다. 선생님도 공부만 잘하면 정식 초등학교로 갈 수 있다고 책도 빌려주고, 여러 가지 공부를 시키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아니나 다를까, 공민학교를 다닌 지 일 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은 초등학교 편입 시험을 볼 수 있는 추천장을 써주셨다. 나는 얼떨결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4학년에 편입 시험을 치렀다. 정말 하나님이 도왔는지 운 좋게 합격을 했다.

천막학교와 공민학교, 2년을 다닌 실력으로 초등학교 4학년에 월반하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너는 커서 판사가 되어라. 이렇게 공부 잘하고 똑똑한 걸 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며 수도꼭지처럼 철철 눈물을 쏟았다. 어머니가 어디서 여판사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딸이 판사가 되기를 원하는지 몰랐지만 그까짓 어머니의 소원인데 무엇이든 다 들어드리고 싶어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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