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랑] 망막색소변성증 앓는 권정현 양

입력 2017-02-21 04:55:01

"부모의 아픔 밖에 물려 준 게 없어 미안해요"

우태욱 기자 woo@msnet.co.kr
우태욱 기자 woo@msnet.co.kr

권정현(가명'12) 양은 또래보다 서너 살은 어리게 행동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모조리 꺼내 바닥에 쌓는가 하면, 인형을 치료한다며 휴지를 붕대처럼 풀어 이리저리 늘어놨다. 시력을 거의 잃은 엄마 이경희(가명'41) 씨가 허공을 더듬으며 "가만히 있어"라고 달래도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나이지만 정현이는 아직 용변을 가리지 못하고 기저귀를 찬다. "정현이는 지적장애 3급이고 또래보다 2, 3년가량 발달이 느려요. 몸이 많이 아프다 보니 뇌 발달도 지장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정현이의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엄마로부터 망막색소변성증을 물려받아 시력이 나쁘고, 아빠의 신경섬유종이 유전돼 정현이의 뇌에는 다발성 양성종양이 자라고 있다. 미숙아로 태어난 정현이는 심장도 건강하게 뛰질 못한다. 경희 씨는 "그래도 정현이랑 마주 보고 웃는 날이 더 많다"고 했다. "남편도 떠나고 아무도 우릴 도와주지 않아요. 그렇다고 얼굴 찡그려봐야 우리만 불행해질 뿐이에요. 항상 웃는 얼굴로 긍정적인 생각만 하면서 살 거예요."

◆시력 잃은 엄마, 남편과도 이별

망막색소변성증을 앓는 경희 씨는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 1급이다. 경희 씨의 온몸에는 상처가 아물 날이 없다. 33㎡ 크기의 좁은 집에서 툭하면 가구에 부딪치고,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튀어나온 오토바이나 자전거에 놀라 넘어지는 일도 잦다. 교통사고가 난 적도 여러 번이다. "교통사고 후유증인지 온몸이 쑤시는데 병명을 모르겠어요. 진통제도 소용이 없고요. 퇴행성 관절염에 류머티스성 관절염까지 겹쳐 걷기가 쉽지 않네요."

지난 2005년 결혼한 경희 씨는 9년 만에 남편과 헤어졌다. 남편은 갑상선암에 걸린 경희 씨가 받은 보험금 2천만원으로 빚을 갚고 푸드트럭 사업을 하는 데 모두 밀어 넣었다. 생활비를 달라는 경희 씨에게 남편은 "빚을 갚느라 돈이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푸드트럭 사업은 고작 1년 만에 접었다. "남편은 전혀 힘이 돼주지 않았어요.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이럴 바엔 헤어지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경희 씨는 "남편에게 신경섬유종을 물려받은 정현이가 딱할 뿐"이라고 했다. 신경섬유종은 담갈색의 피부반점을 주 증상으로 혹이 생기는 병이다. 경희 씨는 정현이의 뇌를 온통 점령하고 있는 양성종양이 더 자라지 않길 바라고 있다. "얼마 전 TV 교양 프로그램에 신경섬유종으로 힘겨워하는 20대 여성분이 나왔다던데, 정현이도 같은 아픔을 겪게 될지도 몰라요."

◆발달 더딘 아이, 매년 검사비만 100만원 넘어

정현이의 심장은 태어날 때부터 아픈 곳이 많았다. 정현이가 세 살 되던 해, 출생 후 닫혀야 하는 동맥관이 닫히지 않아 서울의 한 병원에서 시술을 받았다. 지금도 심장의 판막과 폐동맥 등에 문제가 있고 앞으로 계속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의사는 "매년 검사를 하며 경과를 지켜봐야 하고 상황이 나빠지면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했다. 유전된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 치료마저 불가능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눈 건강에 좋다는 건강기능식품에 의지한다.

지난해 9월 한 사회복지재단의 지원으로 정현이는 심장과 뇌, 눈을 검사했다. 앞으로도 매년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검사비만 100만원을 훌쩍 넘는다. 매달 100만원 남짓한 기초생활수급비로 생계를 꾸려가는 모녀에게 병원비는 병보다 무거운 짐이다. 정현이의 더딘 발달은 경희 씨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에 진학하는 정현이는 수업 내용을 잘 잊어버리고 걸핏하면 물건을 잃어버린다. 수년째 재활치료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발달이 더뎌 경희 씨는 답답할 따름이다. "정현이가 사람들을 좋아해서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많이 노력해요. 그런데 친구들이 정현이를 피해서 상처를 많이 받나 봐요. 특수학교에 보낼까 생각해봤지만, 일단은 정현이를 믿고 기다려볼 거예요."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