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S변호사님께

입력 2017-02-16 04:55:02

변호사님, 안녕하신지요. 이틀 전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변론이 열린 헌법재판소 심판정에서 태극기를 펼쳐들었다 제지당한 변호사님을 보고 펜을 들었습니다. 26년 만에 처음으로 변호사님에게 편지를 씁니다. 저는 1991년 변호사님의 도움을 받은 법과대학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3당 합당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했다 집시법으로 구속됐었습니다.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구치소에서 두려움에 떨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교수님들과 선후배들의 간청을 받아들인 변호사님은 기꺼이 무료 변론을 맡아주셨습니다. 변호사님의 헌신적인 변론으로 저는 곧 풀려나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감격에 젖은 저에게 법과 정의를 외치는 변호사님의 음성은 20여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변호사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2013년 개봉된 영화 '변호인'을 통해서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됐던 '부림사건'(부산 학림사건)의 재판을 맡은 담당 판사가 변호사님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부림사건'은 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부산 지역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0여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한 사건입니다. 부산지법 단독 판사였던 변호사님은 20여 명 가운데 3명에 대한 재판을 맡으셨죠. 피고인 2명에게 선고유예와 집행유예, 나머지 1명에게는 징역 1년을 선고했습니다. 검찰이 징역 5년, 징역 10년을 구형했던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량이었습니다. 이 판결로 변호사님은 진주로 좌천된 후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시민단체에도 참여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나선 시민들과 운동권 학생들을 돌봐주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셨죠. 대구에서 변호사님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님의 실제 모습은 영화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2014년 우연히 대구 동성로에서 전단을 돌리는 변호사님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전단을 받아 본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의 극단적인 주장을 옮겨 놓은 내용을 보고 제가 알던 변호사님이 맞는지 헷갈리게 되었습니다.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져 있는 변호사님을 보고 어리둥절했습니다. 변호사님은 종편 채널에 출연해서는 "부림사건 무죄판결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후회한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변호인'에 대해서도 "정치 선동 영화"라고 비아냥댔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진보적이었던 변호사님이 정반대의 길로 방향 전환을 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혹자는 부림사건 판결로 좌천된 후 진보진영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사상적 변화를 일으킨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을 하기도 합니다.

학창시절 제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변호사님의 큰 자리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속의 영웅을 떠나보내기에는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한 번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변호사님을 다시 본 것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건 2차 변론 기일에서였습니다. 변호사님은 북한의 노동신문을 언급하면서 "촛불 민심은 국민의 민심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박 대통령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에 비유하였습니다. 야당의 비난은 물론 같은 변호인단조차 변호사님의 발언을 말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님이 인용한 노동신문 기사는 '가짜 뉴스'로 밝혀졌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변호사님의 징계 요청 건을 대구지방변호사회에 넘겼습니다. 동료 변호사들조차 변호사님의 거침없는 발언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보통 사상은 변하지 않기 마련인데 변호사님의 신념은 시대에 따라 바뀌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변호사님의 요즘 모습을 보면 봉건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변호사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의 마음속 영웅을 뺏어가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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