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울수록 매력있고 행복…한국 춘란 대중화·세계화가 꿈"
대구 수성구 지산동 수성소방서 건너편에 위치한 난 연구소 '관유정'(寬裕亭). 660여㎡의 난실(蘭室)에는 오묘한 색깔과 고운 자태를 지닌 수천 포기의 난이 저마다의 향기를 내뿜고 있다. 모두 춘란(春蘭)으로 종류만도 수백 종류에 이른다. 관유정을 관리하는 이는 농업명장(춘란) 1호인 이대건(50) 씨다. 30여 년간 춘란을 연구해온 이 명장은 '한국 춘란 형태학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난 전문가다. 이 명장은 "난은 키울수록 매력 있고 행복을 주는 화초"라고 했다.
◆농업이 좋아 시작…난 전문가로
대구 달서구 월배에서 태어난 이 명장은 초등학교 때 파브르 곤충기를 읽고 동'식물에 눈을 떴다. 중학교 때 '농업' 과목을 처음 접했다. 다른 과목 성적은 신통치 않았지만, 농업만큼은 항상 만점을 받았다. "앞으로 농업이 뜨는 시대가 온다"는 농업을 가르치던 선생님의 권유로 대구농고 원예과에 진학했다. "학교 가는 것이 소풍 가는 것처럼 즐거웠다.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니 학교생활도 만족스러웠고 성적도 상위권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고2 때는 '우수 농고생'으로 뽑혀 100만원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고교를 졸업한 이 명장은 잠시 마사회에 근무하다가 군에 입대했다. "2군사령관 공관 정원의 난과 분재를 돌봤는데, 상관이 '난을 죽이면 영창을 보낸다'고 겁을 주기에 관련 책과 잡지를 사서 보는 등 원예 공부를 했다"고 했다. 상관은 제대하는 이 명장에게 '네가 난을 관리하면 죽어가는 난도 살아났다. 제대 후에는 난으로 업을 삼아라"고 권유했다며 "이때부터 '난'과 인연이 시작됐다"고 했다.
제대 후 창업했다. 산에서 춘란을 구해서 팔기도 하고, 분재도 취급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이 하잘것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게를 접고 도서관, 헌책방 등지를 다니면서 난에 관련된 책이란 책은 모두 섭렵했다. 일본이 난 선진국이란 사실을 알고 일본 유학을 결심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스승을 찾아 나섰다.
◆최고의 스승 만나 난 재배 기술 전수
당시 난 업계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알려진 정정은 선생을 알게 된 건 이 명장에겐 행운이었다. 정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기술은 그의 난 인생에 전환기를 마련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스승은 '최고의 난 전문가'가 되라며 농장 창업자금까지 지원해줬다. 그러면서 난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할 것, 신용을 목숨처럼 여길 것 등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 이 명장은 스승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다시 난 가게를 냈다. 사업은 번창했다. 그러나 옆집 신축 건물에서 시너가 흘러들어와 난이 죽고, 비닐하우스는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값싼 중국산 춘란이 대량으로 수입돼 사업을 접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대표 난 전문가가 되다
위기의 순간에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이 명장의 열정과 기술을 지켜본 한 애호가가 선뜻 손을 내밀었다. "돈은 안 갚아도 좋다. 공부를 더 해 한국의 난 문화를 체계화시키는 매뉴얼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학업도 병행했다. 구미1대학 원예조경과를 마치고, 대구가톨릭대에 편입해 한국 춘란 조직배양으로 석사 학위, 춘란의 DNA분석을 통한 한'중 원산지 판별법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춘란 품종에 대한 SSR DNA 마커의 복합유전자형 결정과 운용'이라는 논문은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국제학술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논문을 쓰기 위해 육지와 백령도, 흑산도, 제주도, 울릉도는 물론 중국 후베이성, 후난성 밀림을 뒤져가며 샘플을 채취했다. "외형으로 보면 한국 춘란과 중국 것이 큰 차이가 없지만 DNA는 분명 다릅니다." 그는 "학위를 따기 위해 중국 산속을 헤매며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의 보람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명장은 한국 춘란에 최초로 차트를 고안해 표준화 작업을 완성하는가 하면 난에 대한 매뉴얼을 개발해 난 심사표준 자료를 만들었다. 또 난의 꽃대에서 새로운 촉을 생산하는 방법의 일종인 '호에서 중투로 발전시키는 키메라 원리'를 개발해 공개했다.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가 하면 연구 자료들을 전국의 난 애호가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그동안 국내외 난 경연대회에서 수차례 입상하면서 '이대건'이란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7년 아시아태평양 세계난전시대회에서는 최연소 동양란 심사위원장을 했다. 임업 분야 신지식인에도 선정됐다. 그러면서 중국산이 넘치는 우리 난계에서 예술성과 향 등을 두루 갖춘 진주소, 천종, 원명 등 67개의 신품종을 개발해 종묘를 보급하는 등 한국 춘란 종 개발 및 확대 보급에 기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이어 2012년에는 대한민국 농업명장에 올랐다.
이 명장은 또 자신이 축적한 기술을 아카데미를 통해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춘란 대중화와 자원 개발을 독려하기 위한 활동이다. 이는 그를 가르친 은사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는 "스승님의 가르침과 은혜에 조금이나마 부응하고 갚은 것 같다"며 겸연쩍어했다.
◆"서양란보다 예쁜 한국 춘란, 조만간 美 수출 물량 선적"…이대건 명장 미래산업화 박차
이 명장은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선물용 난 시장에서 한국 춘란의 점유율을 끌어올려 대중화시키는 것이다. 이 명장은 "한국 춘란의 국제화를 위한 전 단계로 우선 국내에서 춘란의 시장점유율을 끌어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개업, 인사, 승진축하 등 선물로 판매되는 난 시장 규모는 1조원대. "이 중 대부분은 대만이나 베트남에서 들어온 난이다. "국산 춘란이 버젓이 있는데도 쓸데없이 외화가 유출되고 있다. 소고기는 한우를 먹자고 하면서 난은 왜 중국산을 쓰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관공서에 선물로 들어가는 난이라면 국산을 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하나는 한국 춘란을 세계화시키는 것이다. "한국 춘란은 서양란과 달리 같은 품종이라 해도 꽃의 표정과 색상이 각 난별로 다 다르다. 색상과 화형(꽃의 형태) 또한 예쁘다"면서 "최근 들어 미국이나 유럽인들이 한국 춘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이 명장은 최근 미국에 한국 춘란을 수출하기로 계약해 조만간 선적할 계획이라고 했다. "저의 책임과 의무가 한층 더 커졌다. 애호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춘란의 대중화를 실현하고 국제화를 꾀하는 것이 저의 남은 임무이자 목표"라고 했다.
이 명장은 또 춘란 사업은 일자리 창출도 가능하다고 했다. "미래산업인 춘란 분야에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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