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게이트가 남긴 숙제

입력 2017-01-02 04:55:01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 백만원고료 한국문학 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 백만원고료 한국문학 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박 대통령 처음부터 자질 의심 받아

주변엔 환관 들끓어 재정·산업 엉망

재발 막는 길은 대통령을 잘 뽑는 일

차기 대선 절대 虛名에 속지 말아야

작년 10월 24일 예산안 시정연설을 할 때만 하더라도 대통령은 당당했다. 느닷없이 개헌론을 들고 나왔는데도 누구도 그 배경을 짐작조차 못했다. 그날 밤 태블릿 PC 문건이 보도된 뒤에도 비선 실세의 국정 개입만 문제됐다. 그것도 피붙이보다 가깝다는 최순실이 연설문을 고쳐준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 뒤 채 한 달이 안 되어 피의자로 전락(轉落)했다. 청와대 수석을 시켜 최순실 일당의 끄나풀을 대기업 임원으로 취업시키고 이권을 챙겼다거나, 잘나가는 광고회사를 공갈을 쳐 빼앗으려 했다는 '그저 그런 잡범(雜犯) 수준의' 범죄였다. 그 정도였다면 국민의 분노는 가라앉았을지 모른다. 최순실 일당의 권력 농단으로 몰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대통령이 주범(主犯)이라는 증거는 너무 많이 나왔다. 마침내 대통령은 한통속인 최순실에게 뇌물을 바치게 강요한 제삼자뇌물죄 피의자로 내몰리는 중이다. 게다가 대통령 주위를 떠돌던 온갖 추악한 루머가 거의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최순실은 대통령 위에 있었고 대통령은 허수아비였다. 사람들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얼굴 주름살을 없애느라 출근조차 하지 않은 대통령에 기막혀 한다. 그것도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이 물속에서 죽어갈 때' 그랬다고 믿는다.

이런 대통령의 전락에 가장 황망(慌忙)한 사람은 당사자인 박 대통령일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자신이 탄핵당할 그 어떤 사유도 없다고 한다.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했다고 해도 국정 총량(總量)의 1% 미만이어서 별것 아닌데 왜들 그러느냐고 억울해 한다. 미르니 K스포츠니 하는 재단은 공익을 위한 것이고, 부정을 저지른 건 최순실 일당이지 대통령 자신은 한 푼도 챙긴 게 없는데 자신이 왜 '연좌제'로 내몰려야 하느냐고 한다. '세월호 7시간'은 관저에서 집무하면서 최선을 다했을 뿐, 관저 근무가 왜 문제냐고도 했다. 늦은 대처도 잘못된 보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듣는 이들이 대꾸할 말을 잊게 된다.

사실 권력은 끝났다. 설사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이 공범이라는 사실이 부인되고, 뇌물죄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탄핵이 기각된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권력 상실은 불변이다. 이미 까발려진 처신만으로도 그녀는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잃은 것이다. 새누리당은 깨져 '비박'은 새살림을 차렸다. 한때 '친박' 좌장을 지낸 이와 당대표 비서실장이던 이가 어서 물러나라고 목을 죈다. 이제 대통령 주변엔 아무도 없다. 문고리 3인방은 쫓겨났고, 충성 맹세를 하고 권력의 줄을 잡았던 자들은 하나같이 등을 돌렸다. 십상시(十常侍)로 불리던 이들은 '진박' 타령을 부른 게 죄가 되어 정치생명이 끝날 판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시정잡배에 불과한 최순실 차은택 일당의 문제인가? 아니다. 오롯이 박 대통령의 몫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대통령의 자질을 의심받았다. 대통령이 맞닥뜨릴 어젠다를 감당할 지식이 그녀에겐 없었다. 용기도 결단력도 정직함도 없었다. 용인술도 없어 대통령 주변엔 늘 권력을 탐할 뿐인 소인배 무리와 아첨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환관만이 들끓었다. 그들은 대통령이 당대표 시절 세종시 같은 얼토당토않은 일을 벌이게 했고, 비대위를 만들어 당명을 바꾸고 보수 정체성을 흔들게 했다. 대통령이 된 뒤엔 빚내서 무상복지란 걸 하면서 재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철강'조선에 해운까지 산업몰락을 방치해 사상 최대 청년실업에다 중산층 붕괴를 불렀다. 대통령에 분노한 이번 촛불시위가 들불처럼 번진 이유다.

그래서 나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대통령을 잘못 뽑은 때문이라고도 하지 않겠다. 그런 말은 이제 너무 구태의연하다. 어쨌든 재발을 막는 숙제는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 첫 번째 문제가 다음 대통령을 잘 뽑는 일이다. 그리고 그 답은 절대 허명(虛名)에 속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토머스 제퍼슨이 민주주의를 두고 한 말이 있다.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은 그 사회에 원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습과 오랜 훈련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며 많은 시간 동안 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얻는 것이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