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감하는 모임이 줄을 잇는 연말이다. 요즘 미국에 사는 한인들 모임에서는 서로에게 물어보지 말아야 하는 금기 사항이 있다. 그것은 "영주권자입니까? 아니면 시민권자입니까?"라고 체류 신분에 관해 묻는 것이다.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인 만큼 저마다 미국에 정착해 살기까지 여러 사연을 가지고 있고, 특히 이민 역사가 그다지 길지 않은 한인들은 합법적인 신분을 유지 못 하고 사는 경우도 많다.
특성상 정확한 집계는 할 수 없지만, 미국 한인 불법체류자 인구를 대략 18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약 112만 명의 미주 한인 수를 고려할 때, 한인 6명 중 한 명은 불법체류자인 셈이다. 이들 중 많은 경우 이민법에 대한 부주의로 합법적 체류 연장 기회를 놓치거나 서류가 미비하여 불법 신분에 처하기에, 이들을 '불법체류자'란 가혹해 보이는 명칭 대신 '서류 미비자'라고 완곡하게 부르기도 한다.
어느 한인 모임에 갔을 때였다. 평소 말수가 적고 얌전한 분이 그날따라 격앙되어 신세 한탄을 했다. 딸 유학을 위해 미국에 왔는데 어찌하다 보니 법적 신분을 유지 못 하게 되었고, 이제 딸과 자신이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딸을 미국 군대에 보내는 길만 남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며칠째 딸을 붙잡고 미군에 입대하면 신분도 해결받고 안정된 미래도 보장받을 수 있으니, 미군에 들어가라고 설득하고 있는데 딸이 통 말을 듣지 않아서 속을 끓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락한 한국의 생활을 접고 딸을 위해 미국행을 택할 정도로 아끼는 딸에게, 도저히 총을 들고 전쟁터로 달려나갈 자신이 없다고 울고불고 난리 치는 딸에게 군대를 강요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애잔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불법체류자 추방'이란 이슈를 대자보에 붙였던 만큼, 이제 이민 정책은 어떤 형태로든 트럼프정부가 풀어 나가야 할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은 불법이민자들과 오랜 공생 관계를 맺어 왔기에, 그들이 갑자기 제거되고 그들의 노동과 역할이 사라진다면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이를 우려한 뉴욕, LA, 시애틀 등 대도시들은 불법체류자들의 보호를 천명했고, 정치와 경제계 지도자들도 이민자 추방으로 생겨날 손실 계산서를 들고 트럼프 설득 작업에 돌입했다.
또 트럼프의 모교인 펜실베이니아대학(유펜)을 비롯하여 수많은 대학들이 체포와 추방의 공포 속에 시달리는 학생들을 보호하고자 적극 나서고 있다. 이 학교들은 경찰에게 학생들의 개인 신상 정보를 넘겨주지 않을 것이며 학교가 학생들을 보호하는 안전한 피난처가 될 것임을 선언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감지되는 대학에 주정부는 막대한 대학 지원금을 끊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UC(University of California) 총장은 "캠퍼스에 머물고 있는 모든 학생들과 직원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그들을 보호하는 것에 앞장서겠다"고 천명하였다. 대학들은 자신들의 득과 실을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어려움에 처한 재학생들을 보듬고 있다.
내년 1월, 불법이민 척결을 선포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불법 신분자들은 긴장과 두려움 속에 연말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이제 미국에서 열심히 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보겠다던 소박한 아메리칸 드림을 내려놓았다. 대신 트럼프가 매서운 채찍을 거두고 따뜻한 배려의 처방전을 그들에게 내미는 꿈 같은 날이 올 수는 없을까 꿈을 꾸고 있다. 인자한 트럼프! 이것은 단지 그들만의 소원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불법체류자들과 함께 동료이자 이웃으로 살아온 수많은 아메리칸들의 드림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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