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의 시와함께] 나무도마

입력 2016-12-15 04:55:02

신기섭(1979~2005)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중 략

상처가 깊을수록 도마는 살찐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나 '싱싱한 야채의 숨결'들이 나무도마에 박힌다. 상투에 정복당할 수밖에 없는 아픔을 시인은 도마의 몸을 빌려 견뎠다. 세월을 조금 더 머금었더라면 어떤 생물이 되었을지도 모를 혹은 그 너덜너덜한 상처마저 절단 나 구체의 흔적이 되었을지도 모를 '나무도마'. 시인의 데뷔작은 때문에 여느 등단작들과 무게가 달랐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안타깝게도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아온 신인의 비보가 되어 돌아왔다. '삶의 이면에 도사린 슬픔의 시를 질리게 쓰고 싶다'던 시인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이제 누가 이 도마 위에 살을 끼얹어 줄 것인가. 가족이라고는 할머니 하나뿐이었던, 그 하나의 가족마저 떠나보내고, 시인은 혈혈단신으로 고시원에 틀어박혀 도마를 깎아왔을 것이다. 여기 주인을 잃은 도마가 있다. 도마가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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