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의 '한계령'
노래의 제목은 '한계령'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었던 한계령과 지금 듣고 있는 한계령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노래를 듣기 위해 이곳에 왔다면 나는 정말 놀라운 노래를 듣고 있는 셈이었다. (중략) 발밑으로, 땅 밑으로, 저 깊은 지하의 어딘가로 불꽃을 튕기는 전류가 자꾸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질퍽하게 취하여 흔들거리고 있는 테이블의 취객들을 나는 눈물 어린 시선으로 어루만졌다. 그들에게도 잊어버려야 할 시간들이, 한 줄기 바람처럼 살고 싶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었다.(양귀자, '한계령' 부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벗어날 수 없는 길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다가 몇 번이나 한숨을 내리쉬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삶인데도 코끝이 시려 왔다. 삶은 본질적으로 고단하다. '한계령'은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고단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단하지만 그 고단함으로 인해 의미를 만들어가는 가장 보편적인 우리들의 풍경을 그린다. 인용된 노래 '한계령'은 혼신의 힘을 다해 세상을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에 대한 연민과 위로의 시선을 상징하는 노래다.
나에겐 양귀자처럼 유년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면서 위안을 받을 만한 그런 유년의 기억도 별로 없다. 오히려 유년의 기억은 나를 아프게 한다. 따뜻했던 기억보다는 가난했던 기억이 더 단단하다. 옹이처럼 박힌 기억들이 여전히 아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아린 기억을 자꾸만 되새김질한다. 기억이 아프다는 그것조차 위로가 되는 것일까? 피를 흘리며 누군가의 등에 업혀서 읍내로 가던 바로 그때 바라본 고향의 비학산 노을, 날아가라고 보낸 연이 다음 날 미루나무에 걸려 있는 절망적인 풍경, 마을 전체를 휘감고 있었던 막걸리의 텁텁한 냄새. 어쩌면 그 모든 유년의 기억조차도, 아프게 하는 기억조차도 위로가 되는 건 현재의 절박한 삶 때문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말이다.
정말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프다. 이 산 저 산 눈물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살고프다. 여섯 동생과 술에 찌들려 돌아가신 소설 속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큰오빠의 쓸쓸한 등이 내게로 다가온다. 소설 참 좋다. 그리고 아프다. 잊어버리라는 산울림. 혹은 내려가라고 지친 어깨를 떠미는 한 줄기 바람. 소설을 다시 읽어가면서 다시 코끝이 아려왔다. 눈 덮인 한계령에 가고 싶다. 거기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 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고/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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