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1925~1981)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서린
하루하루 낡아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가는 한 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어지는
하얀 단층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 닿을 뿐인데 존재와 타자를 연결시키는 고백이 된다. 시를 쓰는 일이 삶을 마중한다는 것과 다름 아니듯, 눈은 세계에 닿으면서 만나지 못한 불가능한 이면을 건드린다. 눈은 내 세계와 타자의 세계를 오간다. 존재할지도 모를 대상을 정지된 상태에서 기다리고 있다. 비가시적인, 그러나 자신만 아는 진정성에서 눈은 어딘가로 닿기 위해 출발한다. 이미지나 미지의 너머 것들 사이에 이동을 만든다. 순간에 고여 있는 정서가 되고 정지된 것 같지만 움직이고 있는 세계가 된다. 눈을 바라보는 것은 이미지의 진정성을 공감하는 것이다. 소리가 되기 위해 언어는 모음이 필요하다. 모음은 단어 속에 오래 쌓이고 녹아 있는 설질이다. 눈은 스스로 하나도 반복하지 않는데 반복되어지는 리듬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다른 공간을 건너온 소리들은 모음과 연음의 번역이 불가능하다. 좋은 시가 그렇듯이, 발음되지 않는 누군가의 술어가 되어 흘러가는 일이 자연스럽다. 발자국을 찍는 일은 인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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