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학생회장으로 일할 때다. 학생과장 선생님의 지시로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모금 사업을 진행했다. IMF 탓인지 유난히 춥고 모두가 힘들었던 겨울, 저마다 500원, 1천원을 꺼내 모금함에 넣었다. 모인 돈이 50만원이 넘었다.
모금한 돈을 전달하기 위해 교장 선생님께 갔다. 학생과장 선생님과 부학생회장도 함께였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담임 선생님의 아버지셨다. 그 때문에 교장 선생님도 내가 아버지 사업이 부도난 이후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던 참이었다. 돈을 들고 교장실에 들어서자 교장 선생님께서는 "네가 가져가라"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 돈을 받아들고 나왔다. 맹세코 절대 나는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처럼 내 지위를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오직 불우이웃을 돕겠다는 순실한 마음으로 했던 일이었다.
당시엔 '내가 학생회장이고, 교장 선생님과 내가 아는 사이기에 내가 득을 본 것은 아닌가', '내가 지금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날마다 빚쟁이의 전화를 받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 걱정이었기에 나는 나보다 더 불우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당연히 내게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우이웃돕기로 학생회가 모금한 돈을 학생회장이 가져갔다는 것, 어쩌면 그 일이 내가 특권에, 특권 의식에 길들여지게 된 시작인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시간이 지나 용서받을 수 있다는 교묘한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 권력 집단이 사적인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 온갖 특혜를 몰아 준 작금의 사태가 나 자신을 늦게나마 솔직하게 돌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인할 수 없이, 내가 그동안 누리고 있던 많은 것이 공공의 것에 대한 권한을 가진 자가 주는 은택을 순실한 마음으로 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나만 그러한가? 우리 모두 특권에 길들여지게 된 개인적 역사를 숨겨놓고 있지 않은가? 동향 사람이라는 이유로 표를 던지고,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승진시키고, 친분이 있는 사람에겐 비평과 비판을 주저하고 있다면 병원에서 내 아이를 받아준 의사를 교수로 만들어주고, 부모를 잃고 힘들 때 함께 있어준 사람에게는 국정까지 관할케 하는 이들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질적인 차이는 조금도 없다.
한 사람을 퇴진시키고, 탄핵시키고, 혹은 하야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평범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순실한 마음의 '특권 의식', '특권에 대한 욕망'이 탄핵되지 않는다면 비선은 결단코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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