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문턱에서 후진국으로 폭삭 주저앉고 있습니다."
3번이나 대통령을 꿈궜지만 실패한 이회창 전 총리는 현 정국(최순실 국정농단)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전 총리는 대선 때마다 '법과 원칙'을 강조했으며, 산업화-민주화 이후에 시스템이 돌아가는 선진 강소국을 지향했다. 이제 정치원로가 된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망가뜨린 법과 원칙, 그리고 국정시스템의 붕괴를 보면서 내심 큰 절망에 빠졌을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도 정치에 입문한 이후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가 '법과 원칙, 시스템'이다. 2번의 대선 출마 때도, "법과 원칙이 바로 선 나라,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나라"를 지향했다. 이 전 총리가 꿈꿨던 반듯한 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은 부녀 대통령, 첫 여성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지만 집권 4년차에 법을 위반하며, 국정시스템을 마비시켰다. 지금 이 나라는 거의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다.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고 있을 아버지와 정치에서 물러난 이 전 총리는 "아이고~~, 정말 이럴려고 대통령 됐느냐"며 한탄할 노릇이다.
◆멀어져가는 선진국의 꿈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세계의 조롱거리가 됐다. '최순실'이라는 민간 여성 한 명이 국정을 쥐락펴락하고, 정부 인사와 주요 국책사업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직접 조사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대통령의 범죄 혐의가 확인될 경우, 이 파장은 또 어디로 튈 지 모른다. 국정중단을 우려하는 대통령의 애국심이 오히려 처량하게 느껴질 정도다.
박 대통령은 선진국의 문턱에서 주저앉은 대한민국호의 시스템 마비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정부에서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할 컨트롤타워인 청와대부터 시스템이 엉망진창이었는데, 정부 부처와 공기업 및 산하기관들에 어찌 선진 시스템 정비를 주문할 수 있겠는가.
제3세계 국가들보다 못한 국정 혼란을 보여준 이번 사건은 대한민국을 몇 십년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박근혜를 지지했던 열혈 지지자들(박정희 향수가 있는 50∼80대)들은 요즘 벙어리가 됐다. 속속 드러나는 실태와 명백한 잘못에 대해, 어떤 반박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봤듯이, 산업화를 이룬 이 나라 애국자들의 피와 땀이 허망해지기까지 한다. 냉정히 평가하자면, 정치인 박근혜는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 후에 20년 가까이 비교적 강단있게 정치를 잘 했다. 하지만 집권 말, 이런 비참한 현실에서, 대통령으로서 갈망하던 선진국의 꿈은 요원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 나라의 기업들마저 불투명한 시스템(과거의 정경유착)으로 몰고 갔다. 청와대의 압력에 의해, 반강제로 각종 후원금을 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대기업들은 이 돈을 미끼로 정부와 모종의 거래를 하려 했다. '이게 나랴냐'는 국민들의 분노는 최대 규모의 광화문 광장 촛불이 됐다.
◆박근혜의 일기모음집과 에세이집
'최순실 게이트'로 나라 꼴도 말이 아니지만, 박 대통령 스스로에 대한 참담함과 자괴감은 또 어떻할까. 박근혜 관련 책 2권을 꺼내봤다. 둘 다 부일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이다. 일기모음집인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1998년 출판), 에세이집인 '결국 한줌, 결국 한점… 그러므로 소중한 삶'(1998년 출판)이란 제목이다. 박 대통령은 부끄러워서, 어찌 이 책을 다시 펴볼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는 1998년 9월24일 일기모음집의 서문에 이런 글을 적었다. "지금 끙끙 앓고 있는 조국이 모든 병을 훨훨 털고 힘차게 일서서서 다시 든든한 반석 위에 서는 것, 그리고 이제 곧 다가오는 21세기는 찬란한 문화국, 세계가 찾는 아름다운 관광국으로서 세계 속에 우뚝서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세대가 부여받은 사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일조하고자 국정에 참여한 것을 보람으로 느끼고 있다." 박 대통령이 2016년 11월14일에 청와대 집무실에서 이 글을 다시 본다면 심정이 어떨까.
에세이집 마지막 페이지에 소개한 짧은 글은 현 시점에서 보면, 자신에 대한 참회록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자기에게 정말 그토록 다시 없는 존재라면 타인의 평에 앞서, 또는 타인의 평이 어떠하든 간에 자기가 스스로를 잘 평가할 수 있을 때 가장 크게 만족해야 할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보아 생각과 언행에 떳떳치 않음이 없고, 양심에 가책되는 바가 없으며, 후회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무게를 지니는 귀중한 평가이다."
위 두 권의 책만 보더라도, 박 대통령은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정치인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다짐이 모두 허망해졌다. 스스로와의 다짐과 약속이 최순실 사태로 산산조각 났으며, 이 나라도 '박근혜'라는 한 사람에 의해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고 있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