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긋불긋 색깔옷 입은 수승대, 조선 선비의 풍류'신의가 빼곡
거창한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기름진 옥토의 젖줄은 황강과 위천으로 아우러지는 물 맑고 경치 좋은 거창. 빛깔도 고운 산지 사과가 유명하며, 근래에는 거창국제연극제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늦가을을 느끼기에 제격인 명승 중의 경승, 수승대와 금원산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가섭암지마애삼존불, 강동마을로 떠나본다.
◆수승대(搜勝臺)
퇴계 향한 요수의 마음 바위에 새겨
바위 모양 거북 닮아 암구대로 불려
거창군청 소재지에서 위천면사무소를 지나 서쪽으로 약 1㎞ 지점에 있다.
수승대는 우거진 노송과 옥빛 맑은 물, 신선이 놀았을 듯한 그림 같은 정자가 어우러진, 명승 제53호로 지정된 아름답고 경이로운 경승지이다. 예부터 원학동계곡의 안의삼동(安義三洞)으로 불리는 함양 화림동, 용추계곡 심진동과 함께 경관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중종 때 요수 신권(樂水 愼權'1501~1573)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구연서당(龜淵書堂)을 건립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바위 모양이 거북을 닮았다 하여 암구대(岩龜臺), 구연동(龜淵洞) 혹은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
1543년 퇴계 이황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신권을 만나기로 했으나 임금의 부름을 받고 급히 올라가면서 '근심 어린 마음으로 보낸다'(愁送)란 뜻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수승대로 고칠 것을 권하는 오언율시를 남겼다. 요수가 답시(答詩)를 보내고 바위에 새겨 그때부터 수승대라 한다. 퇴계가 남긴 시는 다음과 같다.
수승이라 이름하여 새로 바꾸니/ 봄을 맞이한 경치는 더욱 아름답다.
숲 속의 꽃들은 꽃망울 터트리려는데/ 그늘진 골짜기 눈은 아직도 덮여 있네
먼 곳에서 수승대를 그윽이 바라보니/ 그늘진 골짜기 눈은 아직 덮여 있네
먼 곳에서 수승대를 그윽이 바라보니/ 오로지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 더하기만 하구나
언젠가는 한 두루미의 술을 가지고/ 큰 붓 들어 단애의 아름다움을 그려볼까 하노라.
퇴계와 요수가 서로에 대해 가진 큰 신의와 믿음을 느낄 수 있으리라.
수승대에는 식당과 편의점, 안내소, 주차장 등 부대시설이 완비되어 있다. 겨울철에는 눈썰매장도 개장한다.
◆가섭암지마애삼존불
단일암으로 국내서 제일 큰 문바위
삿갓 모양의 동굴 벽에 삼존불 숨어
금원산자연휴양림 속에 깊숙이 숨어 있는 가섭암지마애삼존불 가는 길은 형형색색 곱게 물든 단풍 길과 조잘조잘 쉼 없이 내리는 물소리가 정겹다.
징검다리를 깡충깡충 건너서 10여 분 정도 산길을 거닐면 단일암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문바위가 우뚝 앞을 가로막는다. 신라시대 고찰이었던 가섭사의 입구에 있다 하여 '가섭암'이라고 하며, 고려 말 충신 달암 이원달 선생이 망국의 한을 달랬던 바위라 하여 '순절암' '두문암'이라 부른다.
문바위를 지나서 우측으로 돌아 양쪽으로 갈라진 큰 바위 사이를 비집고 앙증맞고 귀여운 돌계단을 오르면 비스듬한 삼각대 모양 안쪽에 마애불이 나타난다.
아무리 거친 비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삿갓 모양의 동굴 형태를 하고 있다. 불상 오른쪽에 희미하게 새겨진 글씨 일부가 판독되어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엄지와 검지로 맞댄 본존불의 수인이 이른바 아미타구품인 중품상생인이다. 두 보살이 연꽃을 쥐고 있으며, 옆에 염망모(念亡母'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라는 구절도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곧 중앙의 부처가 두 보살을 좌우로 거느린 모양이다. 중앙은 아미타여래, 오른쪽은 관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로 보인다. 보물 제530호로 지정되어 있는 귀한 문화유산이다. 금원산자연휴양림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다. 어른 1천원, 초등학생 300원.
◆강동마을
금원산 아래있는 동계 정온의 고택
솟을대문 위 정려문엔 충절 깃들어
금원산자연휴양림에서 15분 정도 내려오면 왼쪽 금원산 아래 나지막한 산 앞에 옛 고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이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있는 강동마을이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정면에 가장 먼저 솟을대문이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동계고택이다.
동계 정온(桐溪 鄭蘊'1569~1641)은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1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려고 남한산성에서 내려가자 스스로 칼로 배를 찔러 죽으려 하였다. 그의 아들이 급히 창자를 배에 넣고 꿰맸더니 한참 후에 깨어났다고 한다. 정온은 청나라 군사가 돌아가자 시골로 내려와서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집은 마을 가운데 자리 잡고 이웃한 고택들을 양쪽으로 거느리는 듯 당당히 서 있다.
솟을대문 위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정려문(旌閭文)이 볼만하다. '文簡公桐溪鄭蘊之門'(문간공동계정온지문)이라 쓰여 있다. 왕조시대에 충신, 효자, 열녀의 풍속을 널리 알리고 본받고자 나라에서 내리던 표창이다. 끝까지 목숨으로써 절의를 지킨 충신을 기리는 표식이다. 시간이 여유 있다면 옛 고가가 즐비한 황산전통한옥마을에서 고택체험도 해볼 만하다. 강동마을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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