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촛불, 어둠 위에 서다

입력 2016-11-08 04:55:01

지난 주말 전국 곳곳에서 20만 개가 넘는 촛불이 켜졌다. 그런데 촛불의 기운이 심상찮다. 박근혜 대통령의 독직(瀆職)과 최순실 무리의 국정 농단을 기어코 단죄하겠다는 서슬 퍼런 기운이다. 국민들은 '하야'와 '탄핵'의 목소리를 높이고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부정한 권력과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분위기다. 폐족 직전의 새누리당 일부와 민심에 촉각을 바짝 세운 야당은 대통령 '퇴진'을 압박하고 있다.

지난 열흘 사이 박 대통령은 두 차례나 사과를 했다. 하지만 국민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배신감과 허탈함을 잠재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오히려 권력에 집착하는 초라한 대통령의 본심을 국민은 읽어 냈다. 2012년 대선 때 그를 지지했든 그렇지 않든 헌법에 따라 5년간 국가를 잘 경영하라고 막중한 직책을 맡겼다. 그러나 그는 터무니없는 실정(失政)을 거듭하다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공적 권력을 사유화하고 사악한 곁가지들이 음지에서 제멋대로 설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을 도탄에 빠뜨린 것도 모자라 5천만 국민을 능멸했다. 5%의 지지율은 '애초 깜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아버린, 국민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다.

지금 국민은 국민 주권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본령과 가치를 다시 묻는다. 국민이 주권을 가진 자유 민주주의의 기초는 선거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국가와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위다. 이 토대가 무너졌을 때 자유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 역시 국민의 뜻 즉 민의(民意)다. 국가 최고법인 헌법이 국가의 기본 원칙이자 서약서라면 민의는 헌법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생살이자 핏줄이다. 과거 숱한 지도자의 실정에 민중이 어떻게 저항하고 헌법을 바로 세워 국정의 물길을 되돌려 놓았는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국가의 최고 공직자가 국가를 위해 써야 할 권력을 빼돌려 분탕질하고 헌법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면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당하지 않은 힘을 동원해 국가를 소란하게 만든 것만이 내란이 아니다. 주권자인 국민의 등에 비수를 꽂고 비정상적인 사술(詐術)로 나라의 기운을 소진했다면 그 또한 환란이다. 국민이 그 책임을 묻고 징치(懲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결자해지의 목소리가 높다. 얽힌 실타래를 스스로 풀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 앞에는 두 결자해지의 주체가 있다. 하나는 국정을 파탄 내고 국기를 흔든 박 대통령 자신이다. 스스로 깨끗이 청와대를 떠나든지 아니면 인정받지 못하는 권한을 내려놓고 냉궁(冷宮)에서 남은 시간을 조용히 보내든지 두 선택지 중 하나를 뽑아야 한다.

또 다른 결자해지의 주체는 바로 국민이다. 지지한 51.6%의 유권자나 거부한 48%의 유권자 모두 이 땅의 주인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다. 국민과 시민사회가 헌정 질서를 바로잡고 헌법의 물줄기를 바르게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위임한 권한을 되돌려 받고 대통령을 퇴진시키는 것이 현실적인 해법이자 결자해지의 자세다.

지금 우리가 어떤 길을 가든 박 대통령은 무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은 국민의 대리인이다. '정'(正)을 지향하라고 맡긴 자리다. 결코 '사'(邪)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데도 대통령은 '사'로 '정'을 덮고 끝내 질식시켰다. 부정한 권력이 차려 낸 탐욕의 잔칫상은 그만큼 풍성했다. 최순실 일가의 마수(魔手)가 어디까지 뻗고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인간적으로도 이미 분별력이 바닥났고 위신도 품격도 잃었다. 이 때문에 국민은 박 대통령의 어두운 그림자가 헌법 뒤에 계속 어른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스스로 거취를 결단하는 것만이 국민에 대한 도리이자 국가에 대한 예의다. 만약 조금도 그럴 생각도 의향도 없다면 오만과 독선을 겨냥한 촛불은 더 밝아지고 커질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만이 오물을 뒤집어쓴 국민과 헌법을 되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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