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비주얼(格)

입력 2016-11-03 04:54:59

대학교 3학년 딸이 요즘 말이 없다. 사춘기 증상은 아닐 테고, 말 못할 고민이 있는가보다.

'딸 바보'인 집사람은 이유를 아는 눈치인데 말을 안 하고 있다. 얼핏 주고받는 얘기를 정리해 보니 졸업, 취업을 앞두고 아마 성형수술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듯한데, 괜히 원죄(?)를 가진 나에게 불똥이 튈까 봐 아는 척도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집사람이 머리 염색을 해주면서 뜬금없이 "당신 눈썹 문신을 하면 얼굴이 선명해 보여 더 젊어 보일 텐데"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땐 '이제 좀 늙었다고 미운 게 하나씩 보이나'하고 약간 섭섭했었는데, 그 뒤 인터넷에서 시술 가격도 검색해 보는 등 은근히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지인과 식사를 하려고 한 횟집에 갔다. 좋은 걸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스쿠버가 직접 바다에서 잡아온 것만 판다는 곳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소문대로 싱싱함은 기본이요, 깊은 곳에서 잡은 것이다 보니 크기며 비주얼이 이제껏 보던 횟집 음식이 아니었다. 음식은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먹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했던가? 사람이나 음식이나 비주얼의 힘은 무섭다. 특히 우리는 남과의 관계에서 체면치레를 위해 유난히 비주얼에 신경 쓴다.

한 회사에서 제복과 사복을 번갈아 입고 근무 태도를 조사했는데, 제복을 입었을 때 더 친절하고 성실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제복을 입으면 밖으로 나타나는 비주얼 때문에 가능한 모범적인 태도를 지키려고 한다. 예를 들면 신라문화원의 '추억의 경주 수학여행 프로그램'에 참가한 분들은 50, 60대 이상이고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으신 분들이지만, 교복만 입으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행동도 개구쟁이처럼 군다.

얼마 전 야외공연 리허설을 위해 편안한 복장으로 무대 위에 올라갔더니, 주최 측에서 "아저씨 앰프를 이쪽으로 옮겨주세요"라고 해서 머쓱했던 적이 있다. 밖으로 보이는 비주얼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도 신기하다.

'폼생폼사'란 말이 있다. 예전엔 나와 무관한 얘기려니 하고 애써 무시했지만, 어느덧 50대로 들어서니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인생일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비주얼은 외모, 사회적 지위, 대형차, 명품 가방 같은 것들이 아니라 바로 내면에서 우러나는 인성적 비주얼일 것이다.

지금 중추가절(仲秋佳節)이다. 더 늦기 전에 마음의 풍년을 위해 좋은 책도 읽고 단풍 든 산으로 떠나 사색도 즐겨보자. 각자 맡은 일에 내공을 쌓아 잘 생겼다는 말보다는 멋있고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도록 비주얼을 가꾸어 보자.

그나저나 최근 보고 듣기 민망한 일로 나라가 시끄러워져 걱정이다. 이것도 국격(國格) 비주얼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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