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세계유산 도시 꿈꾼다]<5>자연을 담은 절제된 공간, 도산서원·병산서원

입력 2016-11-03 04:54:59

안동의 서원은 건축미에서 우리 문화 본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유학자이자 선비의 전형인 퇴계 이황 선생이 배향된 도산서원의 모습.
안동의 서원은 건축미에서 우리 문화 본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유학자이자 선비의 전형인 퇴계 이황 선생이 배향된 도산서원의 모습.
도산서원 전교당에서는 선비문화 체험 행사가 진행된다.
도산서원 전교당에서는 선비문화 체험 행사가 진행된다.
도산서원 전교당에서는 선비문화 체험 행사가 진행된다.
도산서원 전교당에서는 선비문화 체험 행사가 진행된다.
병산서원 향사례.
병산서원 향사례.

조선 성리학의 요람이었던 서원은 대부분 자연의 품에 터를 잡고 있다. 조선 건축의 대표적 특성이었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 터를 잡고, 자연과 조화로움 속에서 절제된 공간으로 수백 년 이어오고 있다.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낙동강을 앞에 두고, 뒤로는 '도산'(陶山)과 '화산'(花山)이 병풍처럼 둘러치는 곳에 앉아 있다.

안동의 숱한 서원 가운데 유독 이 두 곳의 서원이 관심받는 것은 조선 성리학을 형성한 조선 대유학자 퇴계 이황과 퇴계를 이어 조선 명재상으로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서애 류성룡 선생을 상징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서원들은 자유롭게 정치와 학문을 연구하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었다. 또, 지방 질서와 인재들이 모일 수 있도록 하는 단순 교육기관을 넘어 지방 풍속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건축미에서도 우리 문화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절제 속에서도 공간적 배치를 통해 다양성을 담보했다.

◇퇴계 이황 소박함 담은 도산서당…제자들이 '도산서원'으로 넓혔다

◆대유학자'선비의 전형 퇴계 배향된 '도산서원'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유학자이자 선비의 전형인 퇴계 이황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이 건립했다. 지금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陶山書堂) 영역과 사후에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퇴계 이황은 "일찍이 서원이 세워지는 곳은 존경받을 만한 선현의 일정한 연고지여야 하고, 그와 동시에 사림들이 은거해 수양하며 독서 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서원의 입지 조건으로 제시한 인문 조건과 지리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강학(講學)하던 곳일 뿐만 아니라 산수(山水)가 빼어난 곳이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1557년 57세 되던 해에 도산 남쪽의 땅을 구해 1558년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 1560년에 낙성한 건물이다. 세 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인데, 서쪽 한 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온돌방 한 칸은 그가 거처하던 '완락재'(玩樂齋)이며, 동쪽의 대청 한 칸은 마루로 된 '암서헌'(巖棲軒)이다. 이황이 조성한 도산서당의 유식 공간, 강학 공간은 도산서원 건축에 그대로 반영된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三年喪)을 마치자 그의 제자들과 온 고을 선비들이 1574년(선조 7) 봄에 도산서당 뒤로 땅을 개척, 짓기로 해 조성이 시작됐다.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 낙성과 함께 선조로부터 '도산'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1576년 2월 사우를 준공해 이황의 신위를 모셨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정문은 '진도문'(進道門)이다.

강학 공간은 높게 조성된 기단 위에 서 있는 '전교당'(典敎堂)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서로 마주 보며 좌우 대칭을 한 배치를 하여 강학 공간으로서의 규범을 보이고 있다. 강당인 전교당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건물이다.

◆치장하지 않은 소박함으로도 자연을 담아

퇴계 선생이 생전에 학문을 연구하고 자연을 담았던 도산서당은 소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다. 퇴계가 직접 설계한 도산서당은 도산서원 안에 있지만 한눈에 봐도 서당 밖의 건물과 구조적 차이가 있다. 화려함도 정교함도 없이 질박하기까지 해 서원 건물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 소박함에서 퇴계 선생의 세심한 건축 미학을 엿볼 수 있다.

1546년, 낙향 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서당 터를 찾던 퇴계 선생은 한서암 동북쪽에 계상서당을 짓고 본격적인 가르침을 시작했다. 하지만 왕래가 불편하고 유생들이 늘어남에 따라 건물이 비좁아져 도산 자락에 새로 서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도산서원의 기초가 된 도산서당이다.

이미 도산서당이 생기기 전부터 퇴계의 명성은 전국에 자자해 가르침을 받으려는 유생들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늘어가는 유생들의 숙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퇴계 선생은 직접 기숙사를 건축했고 그 이름을 농운정사라 지었다.

'도산서당', '농운정사', 부속시설인 '하고직사'를 제외한 도산서원의 나머지 건물은 퇴계 선생 사후인 1574년, 지방 유림의 건의로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사당과 함께 전교당과 동'서재를 지어 지금의 형태가 됐다. 이듬해 1575년엔 한석봉이 직접 쓴 도산서원 현판과 함께 액을 받아 지금의 도산서원으로 남게 됐다.

도산서원에는 여느 서원에서나 볼 수 있는 누각이 없다. 누각은 주로 휴식을 위해 사용되던 공간이었다. 별다른 기능이 없는 누각이 없다는 것은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서당을 설계한 퇴계 선생의 건축 미학이 고스란히 담긴 것.

특히, 전교당 앞 양쪽으로 세워진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던 서고 역할을 했지만, 습해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해 기둥 위에 높이 세워 '누'(樓)로도 활용할 수 있어 멀리 낙동강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도산서원을 거닐다 보면 서원이라기보단 복잡한 주택가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입구부터 전교당 앞마당까지 이어지는 돌계단을 따라 오르다 한숨 멈추고 뒤를 보면 서원 앞마당을 가득 메운 매화나무와 멀리 낙동강이 조화를 이룬 풍경이 펼쳐진다. 그제야 옛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산과 물이 있는 곳에 서원을 지으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치장하지 않은 소박함으로 자연을 담아 충만함을 느끼려 했던 것이다.

◇배산임수 풍수 원칙 깬 병산서원…만대루 기둥 사이 '屛山' 꽉 찼다

◆풍산 류씨 교육기관 풍악서당이 모체인 '병산서원'

'병산서원'(屛山書院)은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모체로 건립됐다. 고려시대 풍산 류씨 집안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이 풍산읍 내 도로변에 있어 시끄러워 공부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1572년(선조 5년)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에 의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풍악서당은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가 1607년 재건됐다. 풍악서당이 서원으로 바뀌게 된 것은 1614년(광해군 6)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면서부터다. 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조정으로부터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서원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연당(蓮塘)이 있고, 맞은편 한 단 높은 곳에 2층 누각 '만대루'(晩對樓)가 가파른 계단 위에 옆으로 길게 서서 유식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만대루는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누 아래에는 자연스러운 형상 그대로의 구불텅한 수많은 나무 기둥이 열을 지으며 2층 누를 받치고 있다.

그랭이 기법으로 놓은 울퉁불퉁한 주춧돌과 그 위의 휘어진 듯 꼬불꼬불한 모양의 기둥들은 위층 누마루에 서 있는 반듯한 기둥들과 다른 자연스럽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준다.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마당 좌우의 동재와 서재, 그리고 맞은편의 강당 건물인 '입교당'(立敎堂)이 강학 공간을 형성한다. 강당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세 칸은 대청이고 양쪽 각 한 칸은 온돌방이다.

강당 대청 한가운데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앞쪽을 바라보면, 서원 일대의 경관이 또 다른 모습으로 얽혀 들어온다. 만대루 2층 일곱 칸 기둥 사이로 강물과 병산과 하늘이 일곱 폭 병풍이 되어 얽히며 펼쳐지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그것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극적인 공간 분위기를 만들며 바로 나 자신이 자연 가운데에 묻혀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강당 동쪽 옆을 돌아 들어가면 제향 공간인 사우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사우인 '존덕사'(尊德祠)에는 북벽에 류성룡을 주벽으로 모시고, 동벽에 류진(柳袗'1582~1635)을 종향하고 있다.

◆만대루와 병산이 만드는 서원 건축미의 극치

한국 서원 9곳의 건축미는 세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그중 가장 수려한 서원이 병산서원이다. 배산임수의 풍수 원칙을 지켜 지어진 다른 서원과 달리 병산서원 앞에는 병산이 길게 펼쳐져 있다. 분명 서원 뒤에는 화산이 있고 앞에는 낙동강이 있어 배산임수의 조건을 따랐지만 시야를 가득 메우는 병산의 모습은 풍수지리에 견해가 없는 누구라도 적합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건물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가르침에 따라 서당을 짓고 뿜어져 나오는 서원 앞 병산의 '살'(殺)기를 막기 위해 커다란 만대루를 지었다.

정문인 복례문을 지나 서원 경내로 들어서면 앞마당에 빼곡히 들어선 배롱나무와 압도적 크기로 선 만대루를 볼 수 있다.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서원의 누각이라 하기엔 넓은 만대루는 겉보기엔 여느 누각과 다를 것 없이 텅 빈 공간일 뿐이지만 병산서원의 비밀을 쥐고 있는 중요한 곳이다. 만대루는 유생들이 병산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휴식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바깥세상과 강학 공간을 분리, 고립시키는 울타리 역할을 했다.

만대루 지붕 한쪽에는 북이 걸려 있다. 이 북은 서원의 3가지 금기인 '여자'사당패'술'이 내부에 반입됐을 경우에 울렸다. 산천경개를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던 병산서원 유생이라면 적어도 이 3가지 금기가 아쉽진 않았을 것이다.

만대루를 내려와 강당 앞마당에서 다시 한 번 병산 쪽을 바라보면 만대루 기둥 사이로 꽉 찬 병산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문에서부터 사당까지 병산서원을 한 바퀴 둘러보면 이곳이 서원으로서 최적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앞에는 휴식처인 만대루가 있고 뒤에는 사당인 존덕사가 자리 잡고 있지만 공간적으로 서원의 중심에 위치한 강학 구역이 너무도 뚜렷이 구분돼 제사 때 사당을 찾는 문객들도, 만대루에서 논의를 청하는 선비들도 유생들의 입교당이 있는 강학 구역에는 쉽게 발을 들여놓지 못했을 것이다.

건물을 자연 위에 짓는 것이 아닌, 자연의 일부로 만든다는 성리학의 건축 미학은 다른 서원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을 한 단계 뛰어넘는 병산서원의 건축미학은 9개 서원 중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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