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영국의 도로에서 양보를 배웠다

입력 2016-10-05 04:55:02

영국을 다녀왔다. 일을 내려놓고 간 여행이어서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가졌다. 더 찬찬히 영국과 영국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끈 건 교통이었다. 영국 체류 기간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코치라고 불리는 대형 버스를 타고 다녔다. 앉은 자리가 맨 앞이라서 교통상황을 누구보다 더 자세하게 많이 볼 수 있었다. 덩치가 만만치 않아서 기동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기우였다. 미로처럼 이어지고 일방통행이 많은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도 무리가 없었다.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도배가 돼 있는 에든버러에서도,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 글래스고우에서도 교통 현장은 늘 예상을 뛰어넘었다. 회전 반경이 컸지만 반대편 차로의 차량들이 미리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아스팔트 포장으로 쭉쭉 뻗은 넓은 새 길은 물론 돌들을 깔아놓은 구시가지에서도 경적 소리 한 번 들리지 않고 교통은 물 흐르듯이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신호등이 너무 적었다. 런던 시내 중심가와 중소 도시의 다운타운은 신호등으로 교통을 제어하고 있었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빠져나오면 신호등 없이 차량들이 오가고 있었다. 흔히 하는 말처럼 '짬뽕'이 되는 현장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중심에 회전교차로(回轉交叉路'Roundabout)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1960년대 영국이 맨 먼저 도입했다는 이 교통 방식의 운용 원리는 복잡하지 않다. 오른쪽 차량 우선이라는 원칙만 지키면 되는 거였다. 왼쪽 주행을 하는 영국과 달리 오른쪽 주행을 하는 우리로 치면 왼쪽만 주의하면 되는 것이다. 그 기저에 깔린 대원칙이 '양보'였다. 며칠 전 꼬리물기로 옆 차량의 진입을 원천봉쇄하는 통에 신호등과 횡단보도에 교통안내원까지 나서 가까스로 숨통이 터지는 대구 어느 동네의 출근길 상황을 보도한 적이 있었던 터라 더욱 눈길이 갔다.

타율과 강제가 전제인 신호등 없이도 회전교차로상에서 조금은 느린 속도지만 여러 대의 차들이 자율적으로 무리 없이 갈 길을 찾아가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양보하면 다 같이 빠르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갈 수 있는 지혜가 거기에 있었다. 경적을 울리고 핏대를 올릴 일이 없었다. 정차로 인한 대기 시간이 거의 없어져 친환경적이라거나 교차로 사고 우려도 적다는 점은 부수적인 효과였다. 우리도 2010년부터 회전교차로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지만 보편화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나보다 상대가 먼저라는 양보와 배려가 전제되지 않는 회전교차로는 무용지물 내지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양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 도로에는 너무 생소하다.

회전교차로뿐이 아니었다. 필요한 경우라면 중앙선 침범도 수시로 일어났다. 그러나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운전자들이 공간을 만들어 주며 소통을 도왔기 때문이다. 끼워주지 않으려고 앞차의 꽁무니에 바짝 붙이는 운전자는 없었다. 물론 진입 차량 운전자들은 손을 들어 웃으며 인사를 했고 양보해준 운전자 역시 그랬다. 여기에서도 원칙은 단 하나 양보였다. 교행이 불가능한 구간을 지날 때 멀리서 큰 트럭이 필자 일행이 탄 코치를 향해 상향등을 번쩍번쩍 해 보이는 일도 있었다. 영국 사람들도 별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내가 먼저 들어가니 꼼짝 말고 서 있거나 길을 비키라는 위협용이 아니라 양보할 테니 먼저 지나가라는 표시였다. 역시 양보 두 글자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돌아와서 맞이하는 출근길 풍경은 너무 달랐다. 양보는 없었다. 과격 운전자라는 소리를 많이 듣던 필자 역시 영국행 이전의 운전 습관이 발동되려 했다. 그래도 꾹 참았다. 나라도 달라지자는 마음에서였다. 며칠이 갈지는 모른다. 그래도 양보와 배려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 이상 실천해보려고 한다. 거짓말 같지만 어제 아침 출근에 걸린 시간은 거의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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