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누가 준 선물인가. 하는 것도 없이 큰 것을 받았는데 조금 수고하고 넘치게 받았으니. 문 창호지 바르면 오후 햇살이 아늑하고 찻잔에 김 오르면 뻐꾸기 소리 들렸다. 과일 속에 들어 있는 뜨거운 햇살은 감사와 용서의 능력이었다. 산중 계곡물 소리도 줄어서 간장처럼 졸았다. 수고하지 않고 수확하는 농부는 남의 수고를 훔치는 도둑이다.
문 안으로 거저 들어오는 것은 집안의 보배라 여기지 말라는 선문의 가르침이 있다. 땀 흘리지 않고 얻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기를 기원한다. 돈 잘 버는 것은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절약하는 것이다. 절약은 풍요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가을에 책을 읽는다. 알 수 없는 기운에 몸을 데우고 말씀은 충만하고 기쁨이 된다. 처음 수타니파타를 소리 내 읽었다. 눈물은 줄줄 흘렀고 해가 질 때까지 읽었다.
맑은 가난을 생각하였다. 말씀을 통해 전달해 오는 자발적 가난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가난이 아니다. 덜 풍요로운 삶이 주는 큰 행복은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함은 오히려 사치가 되는 것이다. "작년의 가난은 가난도 아니다. 올해의 가난이 진짜 가난인 것을. 작년의 가난은 송곳 꽂을 구멍이라도 있었지만 올해는 그것마저 없었네."
새벽 6시면 집을 나서 걸었다. 시오리 길 읍내 학교에 가기 위해서 12년을 달리듯 걸었다. 먼지 펄펄 날리는 여름 신작로에 소낙비라도 오면 영락없이 비 맞은 닭이 되었다. 내가 놀랐었던 일이다. 학교 오가는 길에 대장간이 있었다. 그 중간에 풀무질하던 할아버지는 꼭 책을 읽고 있었다. 하루는 용기 내어 여쭤 보았다. 성경을 날마다 읽는다고 하셨다.
1989년 일본에 처음 갔을 때 지하철에서 보았다.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서 있는 사람들도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부여잡고 흔들리면서도 책을 읽었다. 청나라의 증국번은 책 읽지 않는 사람을 꾸짖었다. "진정 책을 읽고 싶다면 사막에서나 사람의 왕래가 잦은 거리에서도 할 수 있고, 나무꾼이나 목동이 되어서도 할 수 있다. 뜻이 없다면 조용한 시골이나 섬이라 할지라도 책 읽기에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감옥에서 면회 온 지인에게 "음식은 걱정 없어요. 다만 책이나 좀 있었으면…"이라고 하였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은 안중근 의사의 진심인 것이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의 '태백산맥문학관'에 가서 보았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 원고는 무려 1만6천500장이었다. 육필의 위력은 상상 그 이상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학원'(책)이 있었다. 월간잡지 하나가 세대를 대표하였다. 우리 지방에 '학원'은 서점에 두 권 내려왔는데 음악 선생님이 구독하고 내가 한 권 읽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청소년들이 지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학원'에서 얻었다고 이화여대 진덕규 명예교수는 회고하였다. 1954년 제1회 학원문학상은 이제하, 황동규, 마종기 시인이 받았고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독서경험이 끊어지고 대학마다 오래된 서점이 사라지고 지식기반이 허약해진 우리는 무엇으로 교양을 삼아야 할까. 이제 소년은 두꺼운 책이 싫어지고 짧고 맛있는 '하이쿠' 같은 짧은 한 줄 시가 눈에 차고, 침침해지는 눈은 난감해할 뿐이다.
지금은 원고지도 A4 용지로 대체되고 손글씨인 육필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인류가 이룩한 기술적 진보 중 가장 위대한 진보는 책이라고 한다. 불을 밝히는 고독한 우주는 거대한 도서관이다. 우리가 놀았던 집, 책이 가득했던 방, 지금도 꿈을 꾼다.
면적은 크지 않아도 자연 가득 마당 너른 집 한 칸에 바람 가득 찻간을 두고 삐걱거리는 마루를 놓아 햇살 담아 경계 없는 두 칸 책 냄새 가득한 북 카페 지으리라. 향기 남은 가을. 모든 것은 책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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