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밀양

입력 2016-09-09 04:55:02

남은 더위가 뒷심을 펴지 못하도록 주말 새벽 비가 내렸다. 기차는 비의 발자취를 따라 차분히 가라앉은 사위를 지르밟으며 달렸다. 밀양에 이르러 강물이 줄달음치는 것을 보았다. 늑골에 작은 구멍 하나라도 뚫리면 금세 평야를 덮쳐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빗방울이 만나 강물이 되고 수평선에 먼저 가 닿으려 몸부림치며 달려가는 뒷모습은 치열했다.

밀양은 내가 1990년대 후반 1년 반을 살았던 곳이다. 이사 갈 때부터 오래 살 것 같지 않았지만 사는 동안 제대로 살고 싶은 생각에 아파트를 구입한 적이 있다. 이사하기 전 그 집을 말끔히 치우고 하룻밤을 설레며 지냈다. 그 집에서 바라보는 밤의 강은 아름다웠다. 저마다 강물에 드리워진 불빛 낚싯줄은 깊은 물 속에서 뭔가를 낚아 올린 차례대로 어두워지다 새벽을 맞았다. 그런데 하룻밤을 보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갈 무렵 대구로 발령이 났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살아보지도 못한 채 집을 다시 팔고 밀양을 떠나왔다.

그로부터 한참 지난 어느 날 친구를 만나러 간 일이 있다. 서로 시간이 없으니 둘이 사는 곳의 중간쯤 되는 곳인 밀양에서 만났다. 그곳은 여전했지만 여름 비가 몹시 내려 추억이 담긴 곳을 찾아다닐 수가 없었다.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러 언덕배기 찻집을 올라가는데 흙냄새를 물씬 맡았던 기억이 난다. 늘 웅크리고 있다 비에 파여 단단한 조임이 풀어졌을 때 마침내 제 몸의 냄새를 내놓는 흙. 비 오는 날에는 가끔 밀양의 흙냄새와 찻집에서 듣던 오카리나 연주 음악이 생각난다.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기억은 하이힐을 신고 거리를 걷다 굽이 빠진 일이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구두를 수선할 곳이 없고 새로 사서 신을 곳도 없었다. 마침 파출소가 눈에 띄기에 들어갔다. 너무나 부끄러운 부탁이지만 경찰에게 조심스레 망치를 빌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었다. 사실은 구두 굽이 빠져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했더니 자신이 해결해 주겠다며 굽을 튼튼하게 두들겨 박아 주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우리 경찰은 민생의 안전을 위해 이런 민원도 해결해 줍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엉뚱한 민원을 익살스럽게 해결해 주던 경찰의 태도 덕분에 인정이 넘치는 곳으로 기억에 남아 있기도 하다.

등지고 떠나는 기차 뒤꽁무니에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하며 밀양 아리랑이 굽이치며 따라왔다. 살았던 기간이 짧아 추억이 많지 않지만 밀양이라는 지명에서 느껴지는 은밀한 말맛은 또 한 번 가서 살아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한다. 오래전 살지 못하고 팔았던 그 집 근처 강이 보이는 곳에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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